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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사랑으로 쓸 수도 있겠습니다

by 송유성

오늘은 교보문고에 다녀왔습니다. 8권의 책을 구입하고 제목을 보니 사랑이 들어간 책이 4권이나 되었어요. ‘사랑이라니, 선영아’, ‘사랑의 생애’,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이렇게 말이에요. 사랑에 관련된 책을 살 계획은 전혀 아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책이었을 뿐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김연수 작가, 이승우 작가, 박연진 시인, 김금희 작가의 대단한 팬이거든요. 못 믿으시겠다면 우리 집에 오셔서 서재를 확인하셔도 좋아요. 응큼한 계획이 의도 되었든 되지 않았든 아마 제 머릿속에는 사랑만 가득했나 봐요. 사랑은 조금 응큼한 구석이 있기는 하니까, 응큼한 계획이 맞았을지도요.

그와 헤어지고 연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어느 밤은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참고 자느라 손바닥에 반달 모양으로 손톱자국이 난 적도 있어요. 헤어지는 밤이 생각나요. 우리의 헤어지는 날은 헤어지는 연인 같지는 않았답니다. 저희는 손을 꼭 잡고 하루를 함께 보냈죠. 지나간 인연에는 칼 같다던 그 사람이었지만 그 칼은 언제나 저에겐 무디기만 했죠. 우는 저를 다독여 주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울기만 하는 저에게 파인애플을 냉장고에서 꺼내와 입에 넣어주었어요. 그날 제가 부탁했어요. 우리 내일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여느 연인처럼 있자고요. 그 사람은 제게 “그게 당신 마음을 조금이라도 낫게 한다면요.”라고 하면서 제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그날 밤, 잠에 들고 싶지 않았어요. 잠에 들면 해가 뜰 것이고 그러면 그는 이제 내 곁에서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날 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울기만 해서 녹초가 된 저의 몸은 야속하게도 잠이 왔어요. 자고 싶지 않다는 나의 말에 그 사람은 저의 어깨를 가만히 쓸어내렸습니다. 새벽에 몇 번이나 깼는지 몰라요. 저는 그렇게나 울었는데 또 울 수 있는 사람의 힘에 놀랐습니다. 사람은 잠에 들면 체온이 약간 올라서 따뜻한 기온이 옆 사람에게도 전해지지요. 그 사람은 잠에 들었고 고소하고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제 어깨를 타고 전해졌어요. 하지만 잠에서 깨면 옆에 있는 따뜻한 이 사람이, 이 실존이 내일의 해와 함께 내 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날 무너지게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껴안고 펑펑 울다 다시 선잠에 들고 다시 눈을 떠서 안 가면 안 되냐고 또 울다가 잠들고를 반복했어요. 마지막으로 깨어나 창문을 통해 여명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어떻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으면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나 많이 참을게요. 참을 수 있는 만큼, 근데 너무 참다가 못 참겠으면 한 번만 보러와 줘요. 하고 부탁했죠.

그는 알겠으니 잠을 좀 자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줬지요.


그 새벽의 약속 그는 기억할까요.


그 약속을 마음에 품고 하루하루를 세어왔어요. 한 달은 참아야지 꼭 참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이 ‘엄마 세 밤만 자고 올게.’라는 잔인한 거짓말에 속아 작은 손가락을 접으며 밤을 세는 것처럼. 매일을 울면서 세어왔어요.

그런데요. 문득 그를 본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졌지요. 그는 갔고, 그를 만난다 해도 그날의 그가 아닐 거예요. 그리고 그는 또 가겠죠.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런 그를 보면 내 사랑이 변할 것 같아 두려워졌죠. 그래서 전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름다운 내 사랑을, 그 새벽 나를 따뜻하게 달래주던 그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사랑만 생각해서 사랑이 들어간 책을 골랐나 봐요. 엄마가 그랬는데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입버릇처럼 ‘왜?’를 달고 다니는 아이였다고요. 근데 평생 그랬어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모양은 왜 저럴까. 저건 왜 저렇게 작동하는 걸까. 저건 왜 만들었을까. 하고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근데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이유가 명확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알고 싶어서 나를 투신해 봤는데 당신이어서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완전한 정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당신을 떠나보내고서도 수많은 사랑을 읽고 사랑을 써요. 근데 잘 모르겠는 문제 중 정답 하나는 알 것 같아요. 내가 했던 것이 사랑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어쩌면 조금 알아낸 정답으로 책 한 권을 내가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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