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거짓말을 적으면 안 되니까, 오늘은 진실만을 적을 다짐을 하고 글을 적습니다.
오늘은 휴일, 일주일만의 휴일입니다. 원인불명의 복통을 한 달가량 앓고 있습니다. 소변검사, 피검사, 엑스레이 촬영, CT 촬영, 위내시경 검사까지 해보았지만, 이상 무, 원인불명의 상복부 통증이라고 적힌 진료확인서를 받았습니다. 1차 병원에서 2차 병원으로 옮겨가 오랜 기다림과 몇 개의 검사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마치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들을 계속하는 것에 이골이 나 있음.’이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중년의 내과 의사가 말했습니다. “스트레스, 신경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에는 원인불명이라는 답답함을 뒤로 하고 한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한의원에서는 처방된 약과 먹어야 할 식단표를 주었습니다. 제 식단표에 적힌 것들은 평소에 구해서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별로 없습니다. 장어, 돌게, 양고기, 염소 고기, 무. 그러니까 무를 막 주식처럼 먹을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도 고구마와 옥수수는 섭취 가능하여 가방에 넣어 다닌 지도 몇 주쯤 된 것 같습니다. 가게의 알바생이 흘깃 내 가방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언니, 강원도 산골 소녀가 들고 다니는 가방 같아요.” 산골 소녀면 뭐 어때요.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데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한의사 선생님이 주신 식단을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경성이라고 하니 내가 뭘 신경 쓰고 있었나 하고 곰곰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작년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일로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작년을 끝으로 퇴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과 연애 중이었지만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울곤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였고요. 올해는 날 자주 울리던 사랑도 떠나고 퇴사 후 새로운 일, 요가를 업으로 삼고자 수련하는 것 외에는 별로 신경 쓸 일은 없는 것 같아서 의아했습니다.
어제 나의 오래된 친구를 만나 간만에 밥을 먹었습니다. 근황 토크를 하던 중 나는 최근에 원인불명의 복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친구가 “너 혹시, 이별 후 너무 괜찮아져야 한다고 애써온 것이 아니냐.” 하고 물었습니다. 헤어지고 난 직후 자신이 보기에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제가 괜찮다고, 괜찮게 지낸다고 반복해서 말했다더군요. 그 사람과 헤어지고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더는 울진 않지만 사실 완전히 괜찮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떠난 일은 마치 산 꼭대기까지 겨우겨우 거대한 돌을 이고 올라갔고 올라가면 같이 들고 내려올 것 같았는데 갑자기 혼자 남겨졌고 다시 내려갈 힘은 이미 올라갈 때 다 써버려서 놓아버리자니 깔려 죽을 것만 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상태로 아직도 그 거대한 돌을 받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그 사람이 꿈에 나오면 눈을 뜨고선 몽롱한 채로 슬퍼하곤 하니까요. 아직도 나는.
하지만 또 매일 그런 상실과 슬픔으로 집약된 하루만을 보냈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저는 자주 괜찮았고 종종 행복했으며 또 문득문득 무언가가 잘려 나간 듯한 상실감도 있었지만 대체로 괜찮은 날들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음. 진짜로 괜찮다고 느꼈었는데.
딱히 복통을 계기 삼아 ‘아, 내가 그 사람과의 이별이 아직도 힘들구나. 나는 마음이 다쳐있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좌절의 늪으로 빠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나의 상태를 다시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은 상태로 바라보는, 그래서 무언가 너무 용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를 재확인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면 앞으로 가는 일보다 조금 후퇴하더라도 다친 마음을 돌보고 쉬어가는 일이 더 중요할 테니까요. 그와 헤어지고 쓴 글들을 며칠 전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글을 썼던 당시에는 진심을 다해 썼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마 거짓을 쓰진 않았을 거예요. 그때는 그런 마음, 또 오늘은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또 다른 행복을 애써 찾고 어쩌면 다 잊은 것 같은 데 라고 종종 착각도 하긴 하니까요. 그리고 다행인 점은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내 마음을 기록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는 한가?’ 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예전에 글들을 찾아 읽어봅니다. 그러면 정제되지 않고 뒤죽박죽 슬픔과 힘듦으로 고통받은 마음이 너무나 날 것으로 쓰여있는 것을 봅니다. 그 날것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지금은 그런 마음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제는 조금 익었나 싶은.
몰라요. 보고 싶으면 보고 싶어도 하고 슬프면 슬퍼도 하고, 또 행복하면 슬픔을 이겨내려고 애써, 가 아닌 온 힘을 다해 행복해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누구는 한 달이면 끝날지도 또 누구는 석 달이면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의 속도대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여전히 나는 애도 중에 있습니다. 조금 느리고 오래 걸리는 나를 데리고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그런 내가 미워서, 나를 어디 몰래 버리고 새로운 나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으니까 어찌할 수 없는 나를 다독이고 다시 영차 하고 일으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겠어요. 계속할 수밖에요. 계속 잘, 버텨보아야지요. 오늘의 일기는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입니다. 서명 복사 지장 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