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 왕성한 대다수의 청춘들이 그렇듯,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일찍 잠들면 뭔가 손해를 보는 것마냥, 실체가 없는 대상과밤늦도록 깨어있기 경쟁이라도 치르듯 그렇게 어둠 속 생경스러운 인조 조명 아래로 자신을 몰아넣곤 했었다.
성숙한 육체와 달리여전히 미성년의 허물을 벗지 못한 정신연령 탓에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뿐,그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마음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육아와 살림, 경제활동 등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피폐해져 너덜너덜해진 육신이었지만, 그 속에 파묻히듯 박힌 퀭한 눈을 억지로 치켜 떠가며 모두가 잠든 그 밤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나만의 시간을, 아니,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받으려 몸부림쳤던, 그 숱한 나날들이지금도 고스란히 몸에 새겨진 듯 이따금씩 생생한 기억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후유증을 묵묵히 감당해야 했던 건 무심한 세월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만 가라앉는 몸뚱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보다 더 힘겹고, 이미 인이 박힌 늦은 취침으로 인한 수면부족으로 허덕이던 나의 일상은, 자본주의가 그토록 침을 튀겨가며 설파해 대던 소위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늘 비효율적인 삶의 궤도를 반복할 뿐이었다.
항상 만성 피로를 달고 다니며 운동부족으로 곤두박질쳤던 체력 등은 일상의 질을 떨어뜨리는주요인으로 제 역할을 발휘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건 나에겐 형벌과도 같은 일이라 가족들 아침밥을 해먹이고 등교시키는 일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나를 무한반복의 지옥 속에 가두었다.
하지만 까뮈가 말했던가? 세상이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삶을 직시하며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렇게 엄마로, 아내로 20여 년을 보낸 후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난 까뮈가 그의 책에서 언급했던 바 있는, 그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진정한 의미에서 그가 말한 그 자유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지만 오랜 습관도 변화로의 의지가 없으면 퇴행하는 것인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50이 넘어서도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여 누가 오전으로 약속을 잡기라도 하면, 거절을 거절할 줄 몰랐던 나는 그 전날부터 마음이 불편해 잠을 설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쩌면 내가 밤낮을 바꿔 생활하는 학원업을 택한 것도 이러한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아니었을까...
그러던 내가 요즈음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기로 했다.
딱히 탐탁잖게 여겼던 아침형 인간으로의 변이를 비로소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새벽 4,5시에 눈을 뜨는 그런 오리지널 아침형은 아니지만 7시 전후로 눈을 떠 하루를 열어젖히기 시작한 것이다.그것도 나름 상쾌하게...
평범한 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이런 사소한 변화가 뭐 그리 대수겠냐만은, 스스로 그것을 수용하고 기꺼이 행하겠노라고 마음을 허한 것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솔직히, 아침에 일찍 깬다는 것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이가 듦으로써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징후 중 하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올초부터 참여하고있는, 나에겐 다소 이른 취업교육 시간들 또한 나를 그러한 상황들 속으로 밀어 넣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움직인 건, 너무 뻔한 말 같지만, 평소 잠들어 있던 그 이른 시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소소한 일상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는 낯설지 않은 생동감과 활기였다. 어떻게 보면 번잡하고 성가시게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아침 풍경들이, 내가 침대 속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때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내가 한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저마다 각자의 짐을 지고 학교로, 직장으로, 삶의 터전으로 향하던그들이 이전에는 그저 지치고 피곤한, 생계를 위해 억지로 행하는,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으로만 비쳤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들에게서 뭔가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면 지나친 나만의 비약일까?
먼 길을 돌아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썼던 그 쳇바퀴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날갯짓을 해본다. 부엉이라고 착각했지만 결국은 게으른 일반 새에 지나지 않았음을, 아님 일반이 아닌 이반을 꿈꾸게 된 부엉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토록 거부하던 눈부신 태양 속으로의 비상을 위해 당분간은,무뎌진 날개를 단단히 손볼 일에만 집중하려 한다.
그 많은 시지프스들 속으로 다시 들어서기 위해서 정작 다듬어야 할 것은 바위가 아니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것 또한 새삼 느낄수 있었다.
일상에서 부딪히게 될 수많은 바위 덩어리들...
정상에 올려놓으면 어김없이 다시 굴러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때론, 시크하게 그 사실을 직시하며 집착이 아닌 자유로 무장한 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묵묵히 나아가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소위 '반항'이라는 또 다른 무기의녹슨 부분을 열심히 갈고닦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