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내 마음 보다 타인의 마음을 소중히한 댓가가 도착했다.

by 친절한다정씨


친정집에 가기 전날이었다.

딸의 분리불안으로 2주 넘게 고생했고, 아직도 아이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설상가상, 막내 남동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엄마 눈치, 남편 눈치, 언니 눈치를 보며 연락을 돌리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주구장창 자신의 마음만 알아달라고 보채셨다.
지친 마음에 “엄마, 나도 힘들어” 한마디 했다가 대번에 욕을 얻어먹었다.
그 순간 마음이 얼어붙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만 고집하는 남편에게 화가 났고,
지독하도록 자신의 감정만 중요시하는 엄마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내 가정을 두고 엄마에게로 달려갈 용기도,
엄마에게 차갑게 매정하게 굴 용기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고장난 마음으로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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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결혼식 한 시간 전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얼굴은 차가워 보였다.

어제 일을 잊은 척,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엄마를 대하며 수발을 들자,
못내 기분을 푸시기는 했다.
휠체어를 타고 오신 엄마였지만, 형제가 많아 서로 도우며 큰 사고 없이 피로연까지 무사히 마무리됐다.

전날 어떤 일이 있었든, 결혼식이 잘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날아갈 듯했다.

하지만 그날 참석하지 않은 형제도 있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형제들 간의 왕래가 끊겼고,
그 일로 작은아버지가 나를 설득하려 했다.

“직은 아빠, 사랑에도 종류가 있어요.
조건 없이 주는 사랑, 물론 좋죠.
하지만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무조건 받아주시는 건 부모님 두 분이면 족해요.

이번에도 이렇게 넘어가면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이고,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또 같은 실수를 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겠죠.”

작은아버지는 그만 이야기하겠다며,
모서리 반대편에 앉아 있던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소파 모서리에서 우리 형제들이 앉아 있는 잔칫상을 바라보며
“나이가 더 먹어야 해”라고 하셨다.

아빠의 슬픈 눈빛,
덤덤하지만 깊은 탄식이 깃든 목소리가 내게로 와 닿았다.

몇 년 위라는 이유로,
몇 년 더 배웠다는 이유로 씌여지는 책임감과 의무들이 내 몸에 덕지덕지 붙는 듯했다.

맛있게 먹던 술도, 괄괄하던 마음도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렸다.

그들이 밉진 않았다.
그저 버거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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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들?! 나도 힘들다구요!
내 마음도 아파 죽겠다구요!
애쓰고 있는 내 마음은 몰라주고 왜 다들 나만 참으라 하냐구요!”

소리치고 싶었다.
술에 취해 운 건지, 서러워서 운 건지, 힘겹게 오래도록 울었다.

아내 역할, 자식 역할, 형제자매 역할, 엄마 역할, 며느리 역할,
하다못해 엄마 모임에 낀 동네 아줌마 역할까지.

부모가 만들어내고, 스스로 만들어낸 그 많은 역할들 속에서
나는 이리 불려가 혼나고 저리 불려가 혼났으며,
수많은 의무와 책임감을 떠안았다.

거절도 못하고 화도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바보 천치처럼 살아왔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취급받도록 만들었기에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만들어놓은 관계 안에 꼼짝없이 갇혀
끝없이 눈치만 보며 살아온 결과가
바로 오늘의 나였다.

비로소 청구서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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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울어도 괜찮다고 마음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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