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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May 20. 2020

그걸 왜 접고 난리야?

무릎꿇고 소설을 읽는 사연

활자중독이란 말은 모르지만 글로 써진 걸 좋아했다.

속독인줄 몰랐는데 빠르게 읽고 있었다.



'흡.....'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내 신경이 내 목구멍안으로 집중된다.

또....신호가 온것이다.


터지지않는 공기방울로 내 목구멍을 막아놓은 듯..숨길도, 침을 넘기는 길도 편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멀미가 심했다.

버스, 승용차, 기차까지 멀미를 해대는 나는 차에 타는 게 너무 싫었다.

시트인지, 차체인지 출처를 알수 없는 탈 것들이 뿜어내는 공통적 냄새에 반응한 것일까?

일명, 차 냄새를 맡으면 자동반사처럼 오감이 곤두섰다.


걸어서 십리를 가는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생존을 위해 차를 탈수 밖에 없다.


거스를수 없는 숙명때문에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해갔다.

창문을 열어두고 최대한 바깥 공기를 마셔보거나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는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는 머리를 크게 돌리지 않고 세반고리관속 림프액이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자세를 잡는다.


그러다 생긴 의외의 기술이 있었으니 바로 간판 읽기였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비춰지는 건물에 다닥다닥 붙은 간판들..


빨간 신호에는 건물에 내걸린 상호를 여유있게 읽기도 하고 초록불이 켜지면  채 읽지 못한 간판들을 버스뒤로 흘려보내줬다.

처음엔 1층을 읽기도 힘들었는데 인간의 한계는 연마하기 나름인지 2층, 3층까지도 가능해졌다.


머리를 많이 움직이면 멀미의 기운이 올라오니고개는 돌리지 않고  무조건 한눈에 봐야한다.

마치 사진을 '찰칵~'찍어내듯이 말이다.

그렇게 간판속 글자를 눈동자안에 담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감각 기관이 좀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속독'에서 그 방법을 쓴다는 걸 알게되었다.

글자를 사진을 찍듯 통으로 읽으면서 시간을 단축하는 이론을  나는 '간판읽기'로 얻게 된것이다.


멀미로 시작해  습득한 읽기능력은 책읽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루 한권 책읽는 것쯤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책이든, 만화책이든 뭐든 빨랐다.

결과와는 무관하게 시험문제지를 제출하고 1등으로 나가는것도 나였다.


하지만 얻는게 있으면 잃는것도 있는게 인생의 맛.

속도는 얻었지만 깊이를 잃었다.



나에게 책은 깊은 사색과는 거리가 먼 스토리를 읽기 위한 수단이었다.

실컷 쇼핑하고는 쳐박아둔 니트처럼 흥미만 채워주는 글자쇼핑을 해온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읽기습관은 고치기 힘들었다.


많이 읽었지만  알듯말듯 손에 잡히지 않는 걸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 보따리를 한가득 지고 있는데 매듭이 너무 단단해서 '어딘가 내 기억속에 가지고는 있는데, 꺼내 쓸 수가 없네..' 흐릿한 이야기 조각들만 떠다녔던 것 같다.


그런 내가 달라졌다.

작가지망생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나서부터다.

브레이크 없는 읽기질주에 제대로 제동이 걸린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내달렸을 페이지를 절반도 넘기지 못한다.

한문장 읽고 탄식...한 줄 더 읽고 감탄사를 내뱉으니 이건 독서인지 은밀한 잠입을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같은 한글 교육받고 세끼먹고 사는 사람인데 세상에 없는 글자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단어들로 만들어내는 글은 문장이 아니라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수십, 수백번 고쳐썼을 시간들이 같이 떠올라 무릎이라도 꿇고 경건하게 읽고 싶어진다.


그렇게 나는 소설책을 접어가면서 보고 있다.

그들은 적확하고 신선한 표현을 접어 내 머리 어딘가에 끼워두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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