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면 안 돼요. 진정해보세요. 지금부터 휴대폰 발신 위치 추적 들어가겠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119 구급차 안에 있었다. 아이와 같이..
"엄마.. 뜨거워.. 뜨거워."
"그. 래.. 아가야. 그래.. 그래... 곧 괜찮을 거야.. 곧...."
하필 왜 그날 집 앞 식당에 갔을까..
그렇게 지나다녀도 한번 가본 적 없는 곳, 그날은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무얼 배우고 늦게 돌아온 날이었다.
30개월, 8개월 아이 둘을 키우는 육아의 무기력함을 벗고 새로운 걸 배워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
어린 두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맡겨야 하는 게 죄송했지만 사실, 숨통이 트이는 날이라고도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나를 목빼고 기다리는 첫째 손을 잡고 둘째는 포대기에 업은 채 버스정류장에 마중을 나와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나가자고 했을까 싶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들어오는 길에 집 앞의 식당 간판을 보고 말했다.
"엄마, 오늘 애들 아빠 늦는다는데 여기서 저녁 먹고 들어갈까?"
평소에 첫째는 식당에 들어가는 걸 거부해 못들어가는 날도 많았는데 그날따라 협조적이였다.
우린 좌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이내 뜨거운 추어탕 두 그릇이 나왔다. 낯선 공간에서 활동 반경을 넓히지 않는 첫째는 내 엉덩이에 꼭 붙어 잘 있어줬다. 어차피 먹는 것엔 관심이 없는 아이라서 식탁 근처에도 오지 않기 때문에 어서 먹고 나가야지 생각했다.
아이들을 조심시키고 덜어먹을 그릇을 부탁하려고 고개를 돌려 이야기하던 순간이었다.
상황판단이 안 되는 느낌이 내 다리에서 났다. '이게 뭐지?' 내 다리를 쳐다보니
바지가 젖어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엎어진 뚝배기와 흥건하게 젖은 아이의 핑크색 티셔츠... 그제야 뜨거워지는 내 다리..
등 뒤에 앉아있던 아이가 내 어깨에 짚고 일어서다 식탁 쪽으로 미끄러진 것이었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찰나였다.
나도 모르게 동물처럼 소리쳤다.
아이를 앉고 주방으로 뛰어들어갔고 택시! 택시를 불러달라고 외쳤다. 옷을 벗겨 찬물을 틀는데 얼마 전 친구가 아들이 손가락을 데었는데 화상병원에 따로 있더라고 통화 중에 말해준 게 생각났다.
생리식염수에 담가서 가는 걸까? 깨끗한 것에 감싸서 가야 하는 건가?온만가지 생각이 입자가 되어 둥둥 떠올랐다.
식당 안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119를 말하는 게 들렸다.
119를 불러야겠어, 집에 있는 멸균 가제를 가져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집이 보일 정도로 몇 발자국 안 되는 거리였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119를 누르고 어딘지 설명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먹통이었다.
미칠 것 같은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되었다.
아이는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겨졌고 비명을 지르다 처치를 받고 진정 주사를 맞고서야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눈물이 났다..
젖은 바지자락이 그때 눈에 들어왔는지 의사가 물었다.
"어머님은 다치신 곳 없어요?"
"네... 저는... 그냥... 조금.."
"그럼 말씀을 하셔야죠.."
그렇게 받기도 미안한 처치를 받았다.
진물이 줄줄 흐르고 밤새 잠 못 드는 아이를 앉고 수백만 번의 자책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왔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줬다.
너무 미안해서 말이 나오지도 안았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심재 2도, 부분 심재 3도의 화상이었다.
예후가 안 좋으면 부분 이식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며 세상에 있는 모든 신을 찾으면 기도를 했다.
다행히 가피제거술 후 새살은 잘 차올라줬고 수술은 피할수 있었다.
드레싱실 입구만 봐도 경기하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한 달여 만에 퇴원을 했다.
"선생님, 이게 끝인가요?"
감염반응으로 열이 오르거나 아파하는 시간.간지러움에 울던 시간이 느리게 지났고 개방된 상처는 서서히 차올랐다.
피부가 재생이 되면 치료는 끝이 난다. 여린 새살이 차오를때 살이 뒤틀리거나 피부질환만 없으면 그냥 경과를 보면서 통원만 하면 된다는 말이였다.
그렇게 이틀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6개월에 한번을...거쳐 일년이 넘는 기간이 지났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는 남았다.
급성장기의 아이라서 자라면서 흉터가 더 커지거나 손상된 피부 조직이 차오르면 불룩하거나 땡겨보이는 걸 막아보는 사후관리의 시간만이 남아있었다.
실리콘 연고를 바르고, 실리콘 시트를 시간간격 맞춰가면 붙이고 오일로 마사지를 하고 콤피패스트로 고정을하고 압박복으로 상처를 눌러주는 일들...
2년을 애쓰고 애써도 더이상 내가 할수있는게 없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을때 비로소 나는 나와 아이의 상처를 놓아주었다.
원래대로 돌려주고 싶은 내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오래걸렸을 뿐 아이는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자랐다.
치료 후 몇개월동안 샤워도 무서워하게 됐던 것도 점차 사라졌고 상처도 시간과 정성을 받아먹고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그래도 남은 상처는 볼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지만 그것역시 엄마인 내가 앞으로 평생을 가져가야 할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간에 나라는 사람의 무한한 이기심을 봤다.
우리가 치료받은 곳은 24시간 365일 응급환자가 들어오는 화상전문병원이었다.
아이를 업고 1층 로비에 나가있을때였다.
분주하게 의료진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송될 환자에 대한 브리핑을 나누며 다급한 그들의 이야기속에 18개월, 기름, 팔,가슴,배, 얼굴.. 이런 단어들이 들렸다.
오른쪽 팔꿈치를 중심으로 하완의 절반쯤 부위였던 우리 아이의 상처보다 훨씬 넓고 거기서 제일 어렸던 우리보다 더 어렸다. 그리고 예후가 가장 안좋다는 기름으로 인한 화상..
아직 보지도 못한 아이였지만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렸다. 그게 어떤 아픔인지 알기에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다.그리고 우리는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은 이기적인 생각이 막을 틈도 없이 새어나왔다.
훠이훠이 머릿속에서 쫒아내보아도 그랬다.
일하다 다쳤다는 볼때마다 흠칫놀라게하는 아저씨의 얼굴을 마추칠때도, 고추장을 만들다가 미끄러지면서 다리에 다 쏟아버렸다는 아줌마를 볼때도,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린것 같은 십대의 여학생의 상처를 보게 될때도 말이다. 안타까움과 한쌍인듯 그래도 이만하면.. 불행의 크기를 저울질 했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수있다는 말은 내 자식을 위한 이기심이 바탕으로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내 아이만은 제발 다치지 않길...하는 마음..
이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좋아, 너무 마음이 아프다"란 마음과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면 당신도 보통의 엄마다.
남의 불행의 크기와 내 불행의 크기를 맞대보면서 '저 만큼만 되었더라면' 원망하거나 '다행이다'하고 조금 안심 하게 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죄스러운 이기심이지만 아마도 평생 그 마음은 내 안에 있을 것 같다.
그건 모성애속에 숨겨진 엄마의 이기심이 아닐까 말하고 싶다.
자식이 생사를 오가게 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이렇게 묻는다면"이해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리고 숨이 막혀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