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십년도 안되었는데 벌써 고장이 나지? 가전도 복불복이라더니 우리껀 뽑기를 잘못했나봐!"
냉장고 앞에서 반찬통을 열고 킁킁대던 내가 분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소리쳤다.
만들어 넣어둔지 고작 이틀이 지난 시금치 나물반찬이 미묘하게 상한 맛이 났기 때문이다.
애써만든 나물반찬이 쉬어 버려야하는 것보다 넣어두기만 하면 품질보장, 선도 보장해줄 것으로 믿던 냉장고의 배신이 더 괘씸했다.
대체 왜? 여러가지를 의심해봤다.
혹시 이사올 때 이삿짐센터에서 냉장고 문짝을 살짝 비뚤게 달고 간 것 때문 아닐까?
높이가 미세하게 안맞는 양쪽 문짝을 보며 어디론가 냉기가 새는건가 생각했다.
아니면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번 냉장고문을 열고 서 있어서 그런가?
괜시리 화살이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심증만으론 고칠 수 없기에 나는 서비스센터에 출장점검을 신청했고 의심 증상란에는 냉기가 약함, 성능 저하 라고 채워넣었다.
"냉장고가 잘 안되요"가 아니였다.
"성능이 떨어졌다!어디 이상이 있다!"거의 고장을 확신했다.
며칠 뒤 회사에서 일하던 중,
"고객님, 오늘 점검을 하러 온 기사입니다."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았다.
수리기사님에게서 예상답변에는 없던 진단을 받았다.
수십만원이 나오는수리비보다..더 충격적인 견적..
"고객님, 냉장고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잘 가동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털을 세우면 반박을 하려는데.. 이어진 설명은 전화기 너머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냉장고는 이상이 없이 잘 가동 되고 있으며 어디 새는 부분없이 정상이다.
그런데 냉기가 나오는 입구마다 꽉꽉 채워 막아둔 나의 식재료와 반찬통들이 냉장고안 냉기 순환을 막았고 아무리 온도를 낮춰도 뒤는 얼고 앞은 상하게 된다. 그러니 용량을 너무 꽉 채워 사용하지 말라는 거였다.
전화를 끊고 여러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벽과 냉기토출구 앞을 살짝 띄어둔 사진과 당부 문자..
그랬다.
늘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잘못 뽑은 기계탓을 했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용의자에 올렸다.
이건 내 힘으로 어찌 해결한 방법이 없는 문제라고 손을 놓고 단정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애초부터 고장나거나 잘못된 것은 없었다.
뒤죽박죽 채운 것, 뒤부터 앞까지 잘 통하지 않게 균형과 조화가 서툴렀던 것, 해결해보려하지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저 채워 넣기만 한거다. 꾸역꾸역 받아 넣고 니가 알아서 소임을 다해라 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넣어두고 나면 잘 잊었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채운 식재료가 가득했다. 계획되지 못한 재료들은 쓰지못하게 되었고 썩어갔다.
대책없는 이 상황..답이 없고
무거워서 쉽게 내다 버릴수도 없는 냉장고 탓을 했다.
살림이랄께 별로 없던 신혼때는 그다지 힘에 부치지 않았다.
그런데 나만 있던 공간에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이름의 다양한 재료가 더해지자 용량이 초과되었다.
이전과는 똑같이 쓸 수 없고 늘어난 재료의 부피만큼 나의 자리를 내어주고 운영을 했어야했다.
그런데 나는 적응을 못했던 것 같다.
한 포기 남은 커다란 김치통을 비우지 않고 한구석에 자리차지 하게 내버려 두고 좁아서 못쓰겠네..하는 삶이었다.
김치는 김치통에란 경직된 생각때문인지 아님 귀찮았던것지 비우고 바꿔야할 것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고 지고 어떤 것도 내려놓고 싶지 않는 마음이 버거웠고 불어나는 책임과 타이틀은 용량 한계에 불이 켜지게 했다.
일시에 켜진 빨간불에 어찌할줄 몰라 손을 놓아버리자 쉬어버린 시금치나물마냥 내 마음도 이쪽 저쪽 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굳게 믿고 쉽게 바꿀수도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신선했던 자존감이 유통기한을 지나버린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것도 하나 하나 꺼내어 봐야하는게 정리의 기본이다.
꺼내서 안을 정리하면 행복이란 온도를 유지하는 하는 방법이 되는구나..
결국 해법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거란걸 깨달았다.
내 안의 쓸모있는 재료들을 잘 찾아내서 멋진 요리로 바꾸는 것도..
비싼 재료를 썩어서 버리는 것도.
한도초과 용량을 조절하는 것도
모두 다...
어디선가 AS를 받지 않아도, 대용량이나 최신식으로 바꾸지 않아도 그냥 내 삶도 여전히 괜찮구나.
나라는 냉장고의 칸을 현명하게 구분해서 전체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구나...
냉장고 파먹기를 해보면 무언가 사서 채우지 않아도 그 안의 재료로도 몇 주는 너끈히 먹고 산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안에 담고 제대로 정의로 내리지 못하고 사는것이 아닐까?
육아가 가져다 준 용량초과의 시간들은 오히려 내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작은 귀퉁이 야채조각도 귀하게 다시 보게 되었다.
하물며 물건도 아끼고 귀히 여기면 잔고장도 없이 쌩쌩한데 왜 나는 육아의 귀한 시간과 나라는 사람의 반짝이는 재능을 검정봉지속에 넣어 썩게 내버려두려고 했을까?
엄마로의 나를 사랑하게 되니 이런 품질보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너! 몇십년은 끄덕 없이 잘 돌아가겠구나!'
엄마는 끊임없이 자리를 내어줘야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의 틈을 유지해야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자꾸 비워내는 노력이 냉장고에도 엄마에게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