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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팬이 생겼다.

무조건적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by 맵다 쓰다

미스터리..


그녀들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던 그 많던 생기발랄한 여인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푸석하게 윤기 없는 비슷비슷한 여인네만 남았단 말인가..


내 아이와 비슷한 또래 엄마들을 하나 둘 알게 되어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통적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불과 1,2년 전의 사진이라는데 그 사이 엄청난 일을 겪은 듯 달라져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모두 출산이라는 문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인체의 신비로 아이를 가지면 몸이 아이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

골반이 벌어지고 엉덩이에 지방을 축적시키는 것처럼 호르몬에 따른 몸의 배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변한 몸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와도 제자리를 못 찾고 있어야 할 곳에선 탈출을 감행하고 이미 입장 불가로 지방 밀도가 높은 곳은 경쟁률이 치열해지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인체신비보다 결정적인 유는 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화장품 풀세트를 순서대로 바르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팩으로 관리하던 나도 변했다.

스킨은 고사하고 아이들 몸에 로션을 발라주다 황급히 문지르는 날은 다행일 정도니까 말이다.


유자적 샤워와 목욕으로 스트레스 풀던 것은 이제 분비물 제거 수준으로 목적만 빠르게 수행한다.

아이와 얼굴을 비비고 하루 종일 안았다 업었다 비볐다를 반복하며 겨우 로션으로 연명하며 키우다 보니 어느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있다.


바로, 주름과 주근깨다.

젊음의 암살자 같은 기미마저 점령한 얼굴을 보자면 애써 거울을 외면하고 싶어 진다.


십수 년 만에 대학 동기를 마주쳤을 때 반가움보다 내 모습이 더 신경 쓰이는 기분이다.

'나 원래 이렇지 않아'라고 구차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나의 모습과 마음..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육아의 시간은 그래서 더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진짜 원초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아서 몸이 힘들기도 하지만 제일 중심이 되어야 할 나에 대한 충족이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다.

아무리 남편이 멋지고 아이들을 잘 크더라도 나에 대한 갈증이 존재한다.

어딘가 텅 빈 느낌이 커져만 간다.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어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못하는 엄마의 현실은 정서적 고립을 만든다.

별 살가운 말 없는 남편일지라도 주인을 반기를 강아지처럼 퇴근 시간만 기다리게 된다.


다른 여자와 다르게 자신을 아끼고 가꾸면서 즐거운 육아를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나는 다를 거야'라고 호기로운 착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전에 입문하니 나와 아이가 먹고 자고 싸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에 차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

'아... 그녀들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구나..'를 깨닫고 ' 잠이라도 푹 자봤으면'으로 소원이 대체되는 현실 자각 타임을 거친다.


이렇게 아가씨와 아기 엄마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첫 아이를 낳고 뼈저리게 느꼈다.

안 되는 것에 욕심내지 말아야겠다고 살아 있는 교훈을 느낀다.


예쁜 짧은 치마 대신 반드시 허리는 밴딩이 들어간 바지여야 하거나 아이를 수시로 안아 올려야 하니 너무 가슴은 페이지 않은 옷이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

그렇게 선택지에서 현재에 맞는, 편한 것들로 추려가다 이상보다 현실에 맞춘 선택을 한다.



둘째 출산 전에 일명, 작업복을 하나 마련했다.

첫아이 때 경험을 생각해보니 출산하고는 거의 집 밖을 나갈 일이 없는데 아이가 24시간 밀착하면서도 활동하기 편한 실내복이 유용했었다.


수유로 불어난 가슴을 쪼이지 않고 의도치 않게 영토 확장해버린 내 엉덩이를 무난히 가려주는 품이 넉넉한 옷.

아기가 비벼도 껄끄럽지 않고 출산하면서 대개방된 내 땀 분비를 감당할 순면 소재.


그렇게 사둔 옷이 흰색 바탕에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회색 바지 세트였다.

마르고 닳도록 입으면서 신생아를 잘 키워내고 계절이 지났다.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계절을 한 바퀴 돈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하루는 길지만 일 년이 다르게 아이들은 자라서 조잘조잘 이쁜 말들을 쏟아낸다.

샤워 후 옷을 갈아입은 나를 보고 첫째가 말했다.


"와~ 이 옷 뭐야? 엄마 예쁘다!"

"응? 엄마 예뻐? 흐흐흐... 그래.. 고맙다, 고마워"


만약에 친구였다면 지금 얘가 날 놀리나?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두 녀석들이 앞뒤로 당겨서 늘어날 때로 늘어난 그런 옷, 하도 빨아서 버릴까 망설이다가 잘 때 입어야지 하고 넣어둔 옷이다.

아이들의 눈에는 뭘 해도 엄마가 예뻐 보이나 보다.

이 옷 정말 예쁘다를 연발하는 아이 눈을 보니 거짓말이 아니다.


"우와 엄마는 좋겠다. 이런 옷도 있고"

터지는 웃음을 참으면 네가 크면 너에게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어둠 속에서 미키는 어딨는지 오리는 어딨는지 옷 속에 그려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면 잠이 든다.



외모가 못나서가 아니라 내 존재에 대한 애정에 대한 의문이 가장 많이 생기는 시기였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를 사춘기 때보다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마치 이제까지 삶은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문이 닫히게 되는 것 같았다. 이전과 이후의 생활과 정체성의 갭에 혼란스러웠다.


인간이 한 생명을 낳는 숭고한 일을 내가 해냈는데 정작 나 자신은 소중한 사람이라고 보듬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하 100층까지 끝을 모르고 내려가는 자존감 암흑의 시기..


하지만 아이는 감지 못해 질끈 묶은 머리라도, 무릎이 닳은 수면바지를 입었어도

어떤 모습이든 엄마가 최고라고 주저 없이 말해준다. 예쁘다, 좋다 수시로 고백을 하고 내 궁둥이만 졸졸 따라다닌다.


아이가 어릴 땐 낯을 많이 가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끔 오시면 울음으로 환영을 해줬는데 내 양쪽 무릎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이고 엄마 무릎에서 좀 내려와라, 엄마 다리 아프겠다."

두 아이와 복닥거리는 며느리 한숨 돌리게 해주고 싶은데 당최 손에 오질 않으니 안타까웠하셨다.

그 때 어머님가 하신 말씀이 늘 기억에 남는다.

"얘야 그래도 넌 참 좋겠다! 이렇게 애들이 널 좋아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맞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도 "나 사랑해? 안 사랑해?" 늘 다짐과 확인을 받는 데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의심의 여지없는 순도 100% 사랑을 주고 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보이그룹 열성팬보다 더한 극성팬이 아닐까?


엄마는 사랑을 주는 존재가 아닌 온전하게 받는 존재이다.

아이에게 전부인 엄마.. 이 관계는 어찌 보면 불공평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팬 여러분들이 있어 저희가 있어요!"라는 인기가수의 말처럼 나도 팬이 있어 빛난다.


빌보드1위에 오른것보다 더 기쁜 나의 수상소감을 전해본다.

"제가 아이를 낳았는데요! 우주 최고의 팬이 생겨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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