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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패스권도 통하지 않는 곳

미안해서 미안한 마음에 대해서

by 맵다 쓰다


남들이 말하기로 나는 복에 넘치는 워킹맘이다.

가장 큰 난관을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싶어도 아이를 맡길 곳이라는 대전제가 해결돼야 가능한데 나는 그 어려운 게 해결된 사람이다.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더라도 일반적인 직장 출퇴근 시간과 맞추면 공백이 생긴다.

아이 등원 시간 이전에 출근을 해야 하고 방과 후 돌봄 시간보다 늦게 귀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직장의 시계도 일반적인 곳과 같다.

하지만 앞뒤의 공백시간, 등원과 하원 시간 모두 절대 조력자에게 프리패스권을 요청한다.


아이 낳고 나서 특권이 된 절대 조력자가 내겐 있다.

바로, 애 봐주는 친정엄마..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라고 불리는 나의 엄마는 그렇게 내가 없는 시간에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준다.

엄마와 똑같을 수야 없겠지만 조손 육아만의 널찍한 허용과 무한 내리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내 아이들은 안정감 있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나도 풀타임으로 일 하지만 남보다 조금은 편하게 걱정을 덜고 출근을 한다.


일을 하든, 독점 육아를 하든, 모든 엄마들이 육아를 힘들어하는 시기가 있다.

아이가 아플 때와 방학으로 가정보육의 연속인 시간을 보낼 때이다.


아이들은 신나고 부모는 세끼 먹일 고민, 방학 때 무슨 경험을 하게 할지 고민이 생긴다.

유아든, 어린이든, 학생이든 작은 사회를 경험하지 않고 온전히 쉬고 마음껏 놀 수 있는 방학이라는 시간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기다림이 되나 보다.

달력에 눈사람 그림이 나오지도 않았을 때부터 몇 밤 자면 겨울방학인지가 궁금했던 아이..


엄마가 일하면서 맞이하게 된 4번째 방학이다. 그 사이 아이들도 자랐고 일하는 엄마의 마음도 조금은 단단해졌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인증 사진 속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하루 종일 집안에서 보내게 하는 일하는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애써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두 다 가질 수는 없기에 해줄 수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게 내게 더 이롭다는 걸 터득했기 때문이다.

티브이도 많이 보겠지만 그림도 그리고 인형놀이도, 역할놀이도 동생과 해가면서 잘 지내고 있을 꺼라 믿는다.

할머니와 송편을 만들기도 하고 편의점 데이트도 하면서 알콩달콩 보낸다 생각하면서 아니 솔직히 회사에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일을 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큰 딸아이의 방학이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어린이집에 가는 동생은 개학을 했고 슬슬 집에서 혼자 노는 것도 조금 지겨워졌을 시기였다.

회사 시계가 59분에서 정각으로 '땡' 바뀌기가 무섭게 퇴근하고 가보니 거실이 장난감으로 난장판이다.

어릴 때 자주 읽 병풍책을 주욱 둘러 담을 만들고 그 안에 스케치북이며 크레파스, 스티커 등을 가져다 놓고 동생과 놀이가 한창인 채로 나를 맞이한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이들은 말을 쏟아낸다.


"엄마엄마 이거 봐봐!"

어제 같이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던 '스티커 가게놀이'인 줄 알고 나는 물었다

"우리 쑥이, 오늘 스티커 많이 팔았니?"


아이의 놀이에 아는 척을 해줘야 할 것 같아 물으니 기대와 달리

"아니.."란 대답이 나온다


"왜?"하고 물어보니 시무룩하면서 대답한다.


"손님이 없잖아.. 아무도 안 사러 와.."


"아..."

미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왜 손님이 없어~ 할머니도 계시고, 야옹이도 있고. 미미도 있고.."


"헤~"하고 웃으면 맞네~ 할 줄 알았던 딸은..

"야옹이는 스티커 알지도 못하는데...."

하고 다시 어두운 얼굴을 한다.

뭔가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벌써 6시.. 퇴근하면서 사온 찬거리를 빨리 준비해야 한다.


"엄마, 엄마 저거 좀 봐봐!"

아이는 거실 한쪽 벽 칠판을 가리킨다.

삐뚤빼뚤 글씨로..


"내 집에 놀러 오세요. 엄마 아빠"라고 적혀있다.


"어? 우와! 저거 누가 쓴 거야?"


'집', '세' 같은 어려운 글자가 아래 할머니 글씨로 적혀있는 걸 보니 물어봐가면서 적은 눈치다.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집을 꾸미고 모르는 글씨를 물어가면서 삐뚤빼뚤 적어놓은 초대장을 보니 대견하고 기특하다.


"아! 여기가 집이었구나! 엄마는 가게인 줄 알았네.."


"엄마 빨리 들어와~ 내 집으로~우리 뭐하고 놀까?"


"음... 다 재밌겠는데.. 근데 미안한데 엄마 저녁 준비 좀 하고 밥 먹고 다시 놀러 올게~"



어제저녁에 먹고 싶다던 메추리알 조림을 만들 작정이다.

솥에 물을 올려 메추리알을 삶는다.

급하게 서둘러도 시간이 금세 흐른다.


"나도 나도~"

혼자 하는 게 더 빠르지만 같이 메추리알을 까겠다고 달려드는 둘째 덕에 나는 싱크대와 식탁을 왔다 갔다 하며 아빠와 아이들은 식탁에 앉아서 메추리알을 손질했다.


까놓은 것을 사 왔으면 편했을 것을.. 깐 것은 까먹는 재미가 없어 시시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귀찮아도 그냥 메추리알을 사 와서 절반은 터트리고 절반은 입에 넣어가면서 그렇게 같이 저녁을 준비했다.


어서 상을 차리고 더 먹어라, 빨리 먹어라. 빨리 먹어야 빨리 놀지~ 아이들을 채근하면서 느리게 식사하는 아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넘는다.


오늘은 지난번에 못 버린 음식물쓰레기를 버려야 하는 날이다. 내

오늘따라 많이 나온 냄비에 반찬통을 씻으며 아이들 모습을 넘어다보니 아빠가 틀어준 티브이를 보고 있다.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틀어준 남편이 불만스럽기도 하지만.. 그 사람에게 오늘은 고단한 하루였나 보다 애써 생각하면서 불만을 싱크대 수전을 틀어 흘려보내버린다.


거의 설거지를 마칠 무렵, 갑자기 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엉엉,, 놀지도 못했는데..."


좋아하는 만화가 한프로 끝나고 나니 번쩍 정신이 들었나 보다.

분명히 늦으면 빨리 씻고 잘 준비를 하자고 할 것이고 그럼 저녁 먹으면서 말한 그 수많은 놀이들을 제대로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 나 밥 빨리 먹고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리고 우리 어제 많이 못한 스티커 가게놀이, 무궁화 꼭질(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공주 숨바꼭질도 할 거야~" 씹으라는 밥은 안 씹고 조잘대면 이야기하던 방금 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야. 엄마 지금 다했어! 지금 하면 돼!" 빨리 너희 집에 들어가 있어!"


고무장갑을 던지듯 팽개치고 침대에 가서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갔다.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제 자야 하잖아.. 엉엉"


"왜? 지금 하면 돼지? 방금 전까지 티브이 봤잖아? 지금 하자~엄마 빨리 하고 싶어서 설거지하면서 얼마나 기다렸는데~하자~응?"


"티브이 보려고 한 거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거 쳐다본다고 놀지도 못했어... 흑.."


하루에 아이들과 놀아주는 그 짧은 시간, 자청해서 티브이 틀어준 나의 남자에게 순간 짜증이 다시 났다.

'어휴,, 좀,, 놀아주지..'

하지만 좀처럼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다..


'아. 우리 숙이가 엄마, 아빠랑 놀이 못해서 속상했구나.. 미안해 빨리 못 알아줘서 이제 같이 재밌게 하자"

하니


"아니야. 이제 다 틀렸어, 이미 엑스야.... 취소라고.."

"취소라니?"


"내가 엑스 했다고... 흑.."

거실에 나가보니.. 아까 정겹게 삐뚤거리면 썼던 글자가 지워져 있고 엑스 표시가 여러 번 되어있다.



그 엑스를 보니 갑자기 미안함과 난감함이 같이 몰려든다.

낮에 기다려도, 저녁에 기다려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엄마..


아침에는 회사 다녀와서, 퇴근하고는 밥하고 나서,, 밥 먹고는 설거지하고 나서....



아무리 가장 큰 난관을 프리패스한 복된 워킹맘이라도 제일 중요한 아이와의 시간이라는 큰 장벽이 수시로 나의 발목을 잡는다.

아니 내 마음을 잡아챈다.


아이의 속상한 엑스 표시가 내 마음에까지 엑스를 치는 것 같다.

그 엑스가.. 아이와의 절대 시간 총량이라는 나의 아킬레스를 건드렸다.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기다린 아이의 마음을 알 것 같고 미션 클리어처럼 빨리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재우고 싶은 나의 꼼수가 미안해졌다.


내가 쥔 프리패스권에는 걱정의 free와 함께 너와의 시간도 pass 하는 것이였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쑥아, 오늘 퇴근하고 빨리 너의 집에 놀러 갈게. 꼭 기다려 줘!'

몇 년만 지나도 이렇게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려줄까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또 밤에 나는 다짐하면서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자리가 있다.

장난감으로도, 애정을 넘치게 주는 아빠든, 든든하게 지켜주는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AI가 아무리 발달을 해도 대신할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바로 구멍이 뚫리는 게 바로 엄마의 자리다.

휑 한 느낌이 들게 해서 미안하고 구멍이 난 마음에 대고 바쁜 엄마를 이해해달라고 해서 또 미안한 마음이 또 내 마음에 찌릿한 찬 바람을 스치게 한다.


온전히 마음을 채운 부모 자식의 관계는 어디에도 없고 그저 미안함을 표시 내지 않고 얼기설기 구멍을 좁히려고 노력하는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미안해서 미안한 마음을 이해해줄 만큼 훌쩍 자란 마음을 가질 내 딸을 위해서 내 마음속 미안함은 잠시 덮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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