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봄을 여는 씨앗과 녹은 눈

겨울을 건너 마음에 봄이 피어납니다

by 최순옥
프롤로그: 겨울의 끝에서 맞는 봄

겨울은 끝까지 묵묵했다.

마당의 눈이 천천히 녹아 작은 물길을 만들고,

그 물길은 장독대 옆 돌틈을 지나 밭으로 스며들었다.

고요한 흙 속에서는 봄의 숨결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햇살은 어느새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 햇살 아래, 아버지의 의자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긴 겨울을 함께 버텨온 의자는 오늘따라 한결 가벼워 보였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눈 녹은 밭을 바라보셨다.

그 시선에는 지난 계절의 고단함보다

다가올 계절의 희망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봄이 피어난다


인삼밭의 첫 숨결

“이제, 땅이 좀 숨을 쉬겠구나.”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손에는 지난가을 정성껏 말려둔 작은 인삼 씨앗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알갱이들은

오래 기다린 생명의 빛처럼 반짝였다.

장화를 신은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셨다.

삽 끝이 흙을 밀 때마다, 부드럽고 깊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 비가 오면 좋겠는데…”

그 말이 끝나자 멀리서 잔잔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늘고 따뜻한 빗방울이 밭을 적시고,

씨앗들은 천천히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겨울은 완전히 물러났다.


엄마의 봄맞이와 부엌의 향기

집 안에서는 봄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엄마는 창문을 활짝 열고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겨울 내내 걸려 있던 두꺼운 커튼 대신

얇고 하얀 커튼이 햇살에 나부꼈다.

부엌에서는 냉이와 달래, 씀바귀가 삶아지고 있었다.

연둣빛 김이 피어오르며 김치 익는 냄새와 섞였다.

그 향이 집 안 구석구석으로 번지며

긴 겨울의 냉기를 밀어냈다.

엄마는 손을 털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봄이구나… 또 한 해가 시작이네.”

그 말에는 세월을 견디며 쌓인 온기와,

다시 피어나는 생명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거실 창가의 사랑초와 게발선인장

겨울 거실 벽난로 옆 창가에는 사랑초가 은은한 초록빛으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 옆 항아리 단지에는 개발선인장이 있었다.

스무 해 넘게 자란 그 선인장은 벽난로의 온기를 머금은 채

한 해에 한 번씩, 다홍빛 꽃을 200송이 넘게 피워냈다.

꽃이 터질 때마다 집 안은 마치 봄을 맞는 듯 환해졌다.

크고 웅장한 그 모습은 마치 ‘위대한 탄생’ 같았다.

손님이 오면 모두가 “이야, 대단하다”며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엄마는 그 옆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셨다.

꽃봉오리가 천천히 열릴 때마다,

엄마의 눈빛에도 따뜻한 생명의 빛이 스며들었다.

사랑초의 연둣빛 잎사귀는 선인장의 다홍빛과 어우러져

거실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항기로운 봄

가끔 이모들이 “조금 떼어 가도 되겠니?” 하며 가지를 꺾어가곤 했다.

엄마는 미소 지으며 “그래, 다른 집에서도 기쁨을 느껴야지” 하셨다.

햇살이 창가를 통해 스며들자

꽃들은 기다림을 터트리듯 만발했고,

거실은 온통 봄빛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엄마의 얼굴에도 고운 빛이 번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래된 가족의 사랑이

매년 새로 피어나는 봄처럼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엄마의 빨간 바지와 다홍빛 선물

봄이 어느 날, 옷장 속에서 빨간 엄마 바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이 바지 너무 원색 아니야?”

그러자 엄마는 수줍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동네 친목모임 여덟 이서 울릉도에 놀러 가기로 했단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엄마도 밝은 색을 좋아하실 수 있다는 걸.

그 후 나는 엄마에게 빨간 지갑과 다홍색 스카프를 선물했다.

늘 선물하면 “예쁘다, 그런데 좀 어둡지 않니?” 하시던 엄마였는데,

이번엔 “이건 정말 예쁘다!” 하시며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따뜻하게 물들었다.

그날 이후, 엄마의 옷장에는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봄빛이 가득한 색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아이들의 봄빛 소풍

마당의 눈이 다 녹자,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작은 손엔 알록달록한 풍선,

새 운동화 밑창엔 아직 축축한 흙냄새가 묻었다.

“엄마, 봄이야! 봄 냄새 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판으로 퍼져갔다.

바람이 그 웃음을 실어 나르고, 하늘은 한층 더 맑고 투명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세월을 건너온 평화와 고요한 기쁨이 배어 있었다.

봄기운


에필로그: 의자 위의 햇살

해가 지기 전, 아버지는 다시 의자에 앉으셨다.

손에는 아직 흙이 묻어 있었다.

장작불 대신 저녁 햇살이 손등을 비추었다.

“이제 또 한 해가 시작되는구나.”

그 말이 바람결에 실려 흩어졌다.

마당 끝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이 들리고,

부엌에서는 엄마가 냉이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햇살은 천천히 기울며

아버지의 의자 위에 부드럽게 앉았다.

겨울을 견딘 나무의자와 그 위의 사람,

그리고 새로 피어나는 봄의 숨결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날 저녁,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눈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스며 씨앗을 깨우듯,

우리 가족의 사랑도 그렇게 매년 다시 피어난다.”


작가의 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삶도 그렇게 순환하며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손끝에서, 엄마의 부엌에서,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은

결국 ‘사랑의 계절’이다.

〈아버지의 의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또 한 장을 넘긴다.

눈 녹은 자리마다 새싹이 돋고,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아버지의 의자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조용히 우리 가족의 사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편 예고

〈아버지의 의자 20편 — 들녘의 바람과 인삼꽃〉

봄이 무르익고, 인삼밭에는 하얀 꽃이 피어난다.

아버지는 다시 흙과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은 그 곁에서 계절의 향기를 배운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흙냄새가 어우러진 들판 위에서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