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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맞는 마음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작은 고민과 애정

by 최순옥
프롤로그: 겨울의 초입

겨울이 다가오는 길목, 마을은 이미 차가운 공기에 감싸여 있었다.

이른 아침, 첫눈이 내리기 전의 공기는 더욱 날카롭고, 하늘은 무거운 회색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집 마당의 장독대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고, 작은 얼음 조각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아버지의 의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다.

겨울이면 늘 그곳에 앉아, 뜨거운 차 한 잔을 들고 한 해의 끝자락을 조용히 느끼시곤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은 느리게, 때로는 거세게 내려 세상의 흐름을 알리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한 해를 되짚었다.

가을 내내 쉴 틈 없이 움직였던 부모님의 손끝이 문득 떠올랐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애정이,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김장 준비와 시골 풍경

할머니 손 따라 배추잎 사이로 고춧가루 눈처럼 흩날린다. 김장김치 냄새 속에, 5살 꼬마아가씨의 웃음이 익어간다.

“김장철이 오면, 그 집안의 기운이 달라진다.”

엄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김장하는 날의 시골 풍경은 언제나 정겨웠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나둘 마당에 모였다. 15분쯤 지나면 모두 모여, 커다란 비닐 위에 배추를 가지런히 놓았다.

바람에 섞인 흙냄새와 고추 양념 냄새가 겨울 초입의 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이장님은 손수 무 위에 고춧가루와 양념을 붓고 천천히 머무르며 일손들을 살피셨다.

“잘해야지, 김장은 마음도 담아야 해.”

조용히 내뱉은 말속에도 정성과 책임감이 묻어났다.


아버지는 배추를 물에 담갔다가 꺼내 끝을 다듬고 하나하나 정성껏 쌓았다.

차가운 손끝에도 묘하게 따스한 가족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밥을 담당했다.

막걸리를 따라 놓고, 찐빵을 김 위에 올리고, 달콤한 단감을 씻었다.

보쌈도 준비했다. 딸아이는 키 작은 할머니가 싸주신 보쌈을 맛있게 먹었다.


아들은 편식이 심해 비린 것은 잘 먹지 않았지만,

딸아이는 “엄마, 또 주세요!”를 연신 외치며 먹었다.

절인 배추를 김치로 끓이면 매울 텐데도, 다섯 살 꼬마 아가씨는 먹보처럼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마당 한편에서 아주머니들은 양념을 버무리며 작은 웃음을 나누었다.

장갑 낀 손끝으로 배추 잎을 하나씩 펼치고, 붉은 양념을 바르며 서로의 솜씨를 조용히 비교했다.

김장 풍경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온기와 계절의 리듬이 살아 숨 쉬는 축제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배추 잎과 붉은 양념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마당을 채웠다.

눈부신 겨울 하늘 아래, 사람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온기와 향기가 집 안까지 스며들었다.

김장김치, 어머니 손끝에 담긴 겨울의 사랑
아버지의 인삼과 겨울 준비

아버지는 겨울을 맞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인삼은 해마다 중요한 수확이었다.

아버지는 인삼을 정성껏 다듬고, 햇볕에 말려 약재와 함께 보관했다.


어느 저녁,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손을 멈추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인삼도 이제는 자식 같구나… 어떻게 하면 더 잘 키울 수 있을까.”


말속에는 단순한 농사 걱정이 아닌, 가족을 향한 깊은 사랑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의 의자 곁에는 그날도 인삼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손끝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며 느꼈다.

겨울 준비란, 곧 가족을 위한 마음의 노동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첫눈 기다림과 겨울의 설렘

첫눈 내린 고향집 풍경, 출근길 감악산 자락에도 하얀 추억과 그리움이 포근히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첫눈을 손꼽아 기다렸다.

창가에 앉아 하얀 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은 순수 그 자체였다.

“엄마, 눈 내리면 밖에 나가자!”

아이들의 말속에는 겨울의 설렘이 담겨 있었다.


첫눈이 내리면 마당은 금세 웃음으로 가득 찼다.

작은 손으로 눈을 뭉치고, 눈사람을 만들며 하얀 세상 속에서 웃음이 퍼져갔다.

추운 바람 속에서도, 그 웃음은 집 안의 온기처럼 오래 머물렀다.


겨울 준비와 가족의 손끝

겨울을 준비하는 일은 손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마당의 낙엽을 쓸고, 의자에 앉아 남은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한 해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손끝을 놀리며 겨울 음식을 하나하나 완성했다.

나물, 김치, 된장찌개, 그리고 따뜻한 숭늉 한 잔.

그 모든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가족을 향한 정성의 결실이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것은 노동이 아니라 사랑의 온기였다.


에필로그: 겨울, 그리고 계속되는 사랑

첫눈이 내린 날, 나는 아버지의 의자에 앉아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았다.

눈은 고요히 내리고, 마당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겨울은 차가운 계절이지만, 그 속에도 따뜻함이 있었다.

마당에 쌓인 눈, 김치 냄새, 가족의 웃음소리 —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노래처럼 조용히 흘렀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올 거야.”

엄마의 말처럼, 계절은 흐르고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는 가족의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겨울이 와도, 사랑은 식지 않는다.”


다음 편 예고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오기 전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엄마는 김치가 다 익을 때쯤 다시 봄을 준비할 것이고,

아버지는 새 계절을 맞으며 인삼 밭을 돌보실 것이다.

아이들은 봄을 기다리며 작은 손끝에 힘을 모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자 18편 — 봄의 시작과 겨울의 끝〉


작가의 말

이번 글을 쓰며, 나는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김장 한 판, 첫눈의 설렘, 아버지의 의자에 앉은 한숨과 웃음 속에는

사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잠시 눈을 감고 가족의 손끝과 따스한 온기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작은 노동과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겨울을 함께 건너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모님의 긴 세월 노고, 저 의자에 앉아 잠시라도 따뜻히 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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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