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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부모님의 손끝

엄마의 손길과 아버지의 손끝, 가을 끝자락 속 온기

by 최순옥
프롤로그: 가을의 끝자락

가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들녘의 벼는 이미 베어지고, 볏단은 곱게 말라 있었다. 낮게 깔린 햇살이 들판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은 차갑게 볼끝을 스쳤다.

우리 집 마당에는 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뻗어 다래를 따며 깔깔 웃었다.

“엄마, 이거 먹어도 돼?”

“너무 푸른 건 떫으니 기다려야 한다.”

엄마의 조용한 웃음 속에서 아이들은 기다림을 배우고, 하루의 고단함이 잠시 녹아내렸다.


엄마의 두부와 막걸리, 장인의 손길

엄마는 두부를 만들고 막걸리를 빚는 솜씨가 마을에서도 알아줄 만큼 좋았다.

두부는 부드럽고 고소했으며, 막걸리는 손맛 덕분에 깊은 향과 풍미가 있었다.

엄마의 두꺼운 손, 거친 손이 막걸리를 담아 퍼다 나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 한편이 답답했다.


막걸리를 제일 좋아하던 이는 동네 이장님이었다.

엄마보다 열 살 아래, 큰외삼촌의 친구이기도 했다.

군청에 갈 때면, 관리청에 들를 때면 늘 엄마의 막걸리를 퍼 가곤 했다.

동이 나면 또 부탁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속이 상하고, 엄마의 고생이 싫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럼에도 엄마는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형수님, 솜씨 좋으신데 장인으로 등록해야겠어요.”

이장님의 농담에도 엄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막걸리를 건넸다.

그 손끝에 배어 있는 정성과 따뜻함이, 나는 어릴 적엔 잘 몰랐다.


메주 냄새와 아버지의 새끼줄

며칠 뒤, 엄마는 메주를 쑤기 시작했다.

콩 삶는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고, 김이 피어오르며 절구질 소리가 ‘퍽퍽’ 울렸다.

“손끝으로 눌러야 매끈하지, 그래야 곰팡이도 곱게 핀다.”

엄마의 말에 숨을 고르며 힘을 주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마루 한편에서 새끼줄을 꼬았다.

짚 냄새가 났고, 손끝은 거칠었다.

“이건 메주 매달 새끼야. 너무 헐렁하면 떨어진다.”

짚이 꼬이는 소리 속에서 겨울 준비의 묵직한 리듬이 들렸다.

해가 기울자, 아버지는 새끼줄을 벽에 걸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집안에는 메주 냄새가 가득했다.

“이 냄새가 있어야 겨울에 된장이 맛있지.”

엄마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코끝에 남은 냄새 속에는 묘하게 따뜻한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인삼밭의 도둑과 아버지의 분노

들녘의 벼가 모두 베어질 무렵, 아버지의 인삼밭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 며칠 뒤면 수확인데, 밤마다 밭을 돌며 불빛으로 흙길을 비추셨다.

그러던 어느 새벽, 아버지의 외침이 정적을 갈랐다.

“이놈들이 또 캐갔어!”

밭 한쪽은 흙만 뒤집혀 있고, 굵은 인삼은 몽땅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땅을 움켜쥐고 조용히 말했다.

“여섯 해를 붙잡았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될 줄이야…”

그날 저녁, 아버지는 밥상에서 거의 말이 없었다.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남은 건 괜찮으시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흙만큼만 정직했으면…”

부부의 조용한 위로가 밥상 위에 흘렀다.


세신과 복순이모님의 손끝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나는 세신을 받으러 갔다.

복순이모님은 딸이 시청 주무관이라

나를 늘 “주무관님”이라 부르며 웃으셨다.

나의 애칭 주무관

이모님은 정가는 사람 중 주무관이 있다하셨다. 그냥 정이가고 잘해주고 싶다.

그 따뜻한 말투가 엄마 같아서,

이모님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잠이 오곤 했다.


“많이 힘드셨죠?”

그 말에 나는 아버지의 병환을 이야기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세요. 병원에만 가면 더 걱정돼요.”

이모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곁에 있어주는 게 제일 큰 효도예요.”

그 한마디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모님의 손끝은 따뜻했고, 마음까지 닦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뵈러가는 날

세신한 뒤,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의 얼굴과 손, 발을 닦아드리고

로션을 바르고, 눈썹과 콧털, 손톱을 정성스레 다듬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길 바랐다.

“순옥이는 최고야, 일등이야.”

아버지는 늘 엄지척 하트로 웃으셨다.


브런치에 올린 ‘아버지 미남’ 글을

큰 글씨로 확대해 보여드리자

“미남이 좋지.” 하시며 활짝 웃으셨다.

그 미소가 가을 햇살처럼 따뜻하게 번졌다.


여사님의 따뜻한 마음

근무지 여사님은 매년 김장철이면 김치와 깻잎을 보내주셨다.

올해도 고구마, 단감, 땅콩을 챙겨주셨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스카프에 다래를 싸서 드렸다.

복순이모님께도 다래를 전해드리니,

“주무관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래 정말 맛있어요.”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세상은 아직 따뜻한 손끝으로 이어져 있었다.


연천의 밤, 추억의 불멍

어제는 마음 맞는 부장님들과 함께 연천으로 향했다.

먼저 들른 곳은 ‘연천회관 추억카페’.

흘러나오는 추억의 노래와 커피 향이 어우러졌다.

창가에는 애기 고양이 한 마리가 졸고 있었고,

민준이라는 아르바이트생이 돌림이라는 이름을 알려주며 웃었다.

매니저의 친절함, 연탄빵 서비스,

모두가 따뜻해지는 오후였다.

좋은분들과 행복담기


카페를 나와 농막으로 갔다.

거기엔 고양이 엄마와 새끼 네 마리가 살고 있었다.

조명 아래에서 와인잔이 반짝였고,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며 불멍을 했다.

겉은 살짝 타고 속은 달콤하게 녹았다.

전출 가신 예쁜 미술 부장님, 초빙강사 이샘,

그리고 편한 부장님들까지 함께 웃었다.

추첨 선물에 환호가 터지고,

밤하늘에는 별빛이 내려앉았다.

불빛이 얼굴을 비추며 모두가 말했다.

“이런 밤, 참 좋네요.”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좋은분들과 불멍 별보기


에필로그: 가을이 저물며

밤이 깊어지자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었다.

들녘에는 볏짚 냄새가, 마당에는 막걸리 향이 희미하게 섞여 흘렀다.

나는 아버지의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엄마는 부엌에서 다래청을 담그고 있었고,

아버지는 인삼밭 걱정을 하며 빗자루를 가지런히 세워두셨다.

아이들은 창가에 앉아 첫눈을 기다리며 하얀 숨을 그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고단한 하루 속에도, 변함없는 사랑과 손끝의 따스함이 스며 있다는 것을.

가을은 끝나가지만, 부모의 손끝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다음 편 예고

겨울이 다가온다.

엄마는 김장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인삼을 저장하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메주가 말라가고, 장독대에 첫눈이 쌓인다.

아이들은 창가에 하얀 숨을 그리며 눈을 기다린다.

〈아버지의 의자 17편 — 겨울을 맞는 마음〉


작가의 말

가을 끝에는 늘 따뜻함과 쓸쓸함이 함께 있다.

엄마의 두꺼운 손, 아버지의 거친 손,

그리고 나의 기억 속 그 모든 손끝들.

낙엽을 치우고, 메주를 다지고, 불멍을 바라보던 밤까지 —

삶은 결국 손끝으로 이어지는 온기였다.

고향집 별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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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