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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기억과 길

아이들의 탄생과 가족의 웃음

by 최순옥
햇살의 자리

한여름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길게 스며들었다.

아버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세월의 결이 고스란히 남은 나무 의자 위, 주름진 손등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바람 사이로 풀 냄새와 커피 향이 은근히 섞여 들었다.

아버지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향기, 참 여름 같구나.”


나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되새겼다.

매일 연천에서 의정부까지, 백 킬로미터의 길을 세 시간씩 오가는 출퇴근.

험한 길 위의 사고와 위기, 병원에서 둘째 출산을 기다리던 초조한 시간들,

허리 통증으로 버텨야 했던 긴 나날 속에서도

나는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아버지와 엄마가 이어온 사랑의 숨결을 함께 느꼈다.

할아버지의 사랑
아이들을 돌보던 날들

엄마는 언제나 내 장거리 출퇴근을 걱정하셨다.

아이들이 아파도, 그 모든 돌봄은 늘 엄마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다섯 살 이후에 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며 엄마를 설득하셨다.

그 덕분에 엄마의 하루는 농사일과 두 아이 돌봄으로 늘 고단했다.


첫째도 둘째도 신생아 시절부터 잠을 잘 자지 않았다.

밤이면 놀아달라고 했고, 새벽 이른 시간에 어김없이 깨곤 했다.

엄마는 거의 눈 붙일 틈이 없었다.

“별난 아이들도 다 겪어본다”는 말속에는

아이를 향한 깊은 애정과,

낮잠 자는 틈이라도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고 싶은 마음이 함께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네 살 첫째가 공놀이를 하다

공이 마을 안길로 굴러갔다.

아이는 재빨리 공을 잡으러 나갔고,

그 순간 봉고차가 다가왔다.

아이의 놀란 얼굴, 갑작스러운 오줌, 그리고 기절했다. 엄마의 주저앉으셨다.

순간 엄마는 가슴이 함께 무너져 내렸 하셨다.


다행히 큰 사고는 면했지만, 퇴근길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의 깊은 사랑이, 그날 다시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사랑 아들은 할머니엄마라 불렀다


길 위의 기억

또 다른 날, 차선 변경 중이던 군용 차량이

신호 대기 중인 차를 들이받았다.

앞 차량을 강하게 충격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문을 열자, 15년 전 내가 근무할 때 알던 보안대 관리자가 서 있었다.

그분은 여전히 깔끔하고 예민한 모습이었다.

내 차는 앞부분이 완전히 망가졌지만,

그분이 예전에 건빵과 사탕, 젤리를 건네던 기억이 떠올라

묘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이런 우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의 기억은 참 묘하다.

아주 오래된 장면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

뜻밖의 순간에 다시 깨어난다.


아이들의 탄생과 웃음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 원장님이 말했다.

“눈이 가장 크네요.”

허리 통증이 심해 수술을 원했지만, 결국 자연분만으로 이어졌다.

18시간의 고통 끝에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눈빛, 그 울음,

가족과 지인들의 감탄,

그리고 오빠의 “외계인 같다”는 장난스러운 말까지,

모든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와 엄마의 손길 속에서 아이들은 자랐다.

낮잠조차 잘 자지 않는 둘째를 돌보며

부모님은 매일 묵묵히 사랑을 이어갔다.

그 덕분에 나는 긴 출퇴근과 병원의 고통 속에서도

안심하며 숨을 쉴 수 있었다.


저물어가는 여름

딸과 함께한 여름날, 나는 창가에 앉아 햇살 속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햇살에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작은 손길이

어쩐지 그 따뜻한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랑은 말로 다 표현되지 않지만,

시간과 행동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깊게 흐른다는 것을.


며칠 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의자 앞에 앉았다.

햇살이 부드럽게 비쳤고, 탁자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잔과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어린 내가 웃고 있었다.


나는 둘째 아이를 의자에 앉히며 조용히 말했다.

“이 자리, 할아버지가 앉으시던 자리야.”

아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미소로 바라보며,

“이제 내 자리가 또 이어지는구나.” 하고 웃으셨다.

그때 나는 확실히 느꼈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바로 곁에서 세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사랑 행복
작가의 말

사람은 변하고 흘러가지만,

사랑은 행동과 마음속에서 계절처럼 이어진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름은 잊혀도,

온기와 향기, 그리고 모든 감정은

언제나 우리 곁에 남는다.


아버지의 의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햇살이 비추면, 그 위엔 세대의 온기가 겹겹이 쌓인다.

사랑은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난다.


다음 편 예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아버지의 농사일과 엄마의 아이 돌봄이

계절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이어진다.

아이들이 자라며 마주하게 될 유치원 문제,

작은 사건과 갈등,

그리고 부모님의 묵묵한 희생과 사랑이

아이들의 성장과 웃음 속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그 계절의 기록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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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