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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머무는 자리

오늘을 기억하는 법

by 최순옥
프롤로그 — 이름 대신 웃음으로

아버지는 요즘 나를 “그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날 왜 ‘그 사람’이라 불러?”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내 애칭 막내, 막내 순옥이잖아요.”

아버지는 눈가에 웃음을 띠며 내 손을 꼭 잡으신다.

기억의 일부가 가끔 장난을 치더라도, 손끝의 온기와 눈빛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 안에서 나는 오늘 함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아버지는 언제나 묵묵하게,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기둥 같은 분이었다.


아침의 의식과 주말 풍경

매일 아침, 주간보호센터 차량이 골목으로 들어오면 아버지는 서둘러 외투를 챙기신다.

“오늘은 무슨 날이지?”

“노래방 하는 날이에요.”

“그럼 내가 1등이지.”

그 말에 웃음이 번진다.

버스 창가에 앉아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에 햇살이 닿아 반짝였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아침이, 사실은 기적처럼 소중하다.


주간보호센터에 안 가시는 날

아버지는 마당 구석구석 낙엽 하나, 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가끔은 나를 뒤에 태워주시곤 했다.

오토바이, 경운기, 농기계는 광이 날 정도로 닦으시고,

비닐하우스를 새로 짓고 사다리에 올라 자두나무 가지를 다듬으신다.

내가 “제발 좀 조심하세요!” 하고 외치면,

아버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을 계속하신다.


겨울이면 마당과 옥상, 마을 길까지 눈을 치우신다.

딸아이는 눈사람을 만드는 데 정신이 없다.

작은 손으로 눈을 굴리며 “할아버지, 여기 좀 도와주세요!” 하고 웃는다.

아버지는 눈사람의 눈, 코, 팔, 장갑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참, 멋지다!” 하고 칭찬해 주신다.

그 순간, 눈사람보다 더 눈부신 건 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웃는 모습이었다.


빵빵이는 아버지 배 위에 올라가 팔베개 삼아 잠들곤 한다.

처음엔 0.7kg밖에 안 되던 작은 몸이, 이제는 6.3kg.

그 몸이 아버지 가슴 위에서 살짝 오르내릴 때,

아버지는 “으아악, 내려가라!” 하며 장난스럽게 웃지만 눈빛은 자상하게 반짝인다.

그 따뜻한 순간들이 우리 집의 하루를 채운다.

빵빵이는 3개월에 우리집에 왔다.0.7kg의 아기였던 아이가 여섯살. 6.2kg 의 책 읽는 강아지로 자랐다.


사고와 그 이후

어느 날,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시다 장남교에서 트럭과 부딪히셨다.

피범벅이 되어 한 달간 입원하셨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경운기와 오토바이를 못 타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내가 “이제 경운기랑 오토바이 팔아야겠어요.” 하자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시며 말씀하셨다.

“그거 팔면 내가 널 경찰서에 신고하고 고소할 거야.”

그 농담 섞인 단호함에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이 시렸다.


결국 경운기는 겨우 팔 수 있었지만,

오토바이는 절대 손대지 말라며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다.

며칠을 설득한 끝에 아버지는 마침내 면사무소에 가서

오토바이 면허증을 직접 반납하셨다.

그날, 지역화폐 10만 원 포인트를 받으셨다며

“이제 나도 공무원한테 상 받았어.” 하고 환하게 웃으셨다.

그 한마디에 내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몰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동네 분이 전해주셨다.

“기력이 없으신데 논에서 쓰러지셨길래 제가 일으켜드렸어요.”

점점 줄어드는 기력을 보며 마음이 아려왔지만,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단단했다.


아버지는 가끔 이야기의 방향을 새롭게 흘려보내신다.

“요양사님께 간첩도 잡아서 훈장 받았어. 포상으로 미국도 다녀왔지.”

“북한에도 다녀와서 특진했어.”

현실과 상상이 섞인 이야기 속에서도 아버지의 활기와 유머,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삶의 힘과 웃음, 그리고 사랑을 배운다.


오후의 햇살과 기억

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부엌 의자에 나를 불러 앉히신다.

“커피 한 잔 줄래?”

진한 믹스커피 향이 방 안을 채운다.

“이 향이 좋다. 엄마가 타주던 냄새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향기 속에는 어머니의 기억, 아버지의 청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녹아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내게 물으셨다.

“나는 지금 몇 살이냐?”

“아버지, 여전히 잘생긴 미남이시죠.”

아버지는 소리 내어 웃으셨다.

“그럼 됐지 뭐. 나이는 몰라도, 잘생긴 건 잊지 말자.”

그 웃음에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에필로그 —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

이제 나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일’보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버지가 웃으면 나도 웃고, 아버지가 노래하면 나도 따라 부른다.

딸아이가 눈사람과 빵빵이와 놀며 웃는 모습,

그 작은 행복들이 모여 하루를 온전히 만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면

잊힘 속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자란다.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사랑의 모양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버지의 기억과 힘은 조금씩 변해도

그 안에서 나는 더 단단한 ‘사랑의 모양’을 본다.

함께한 시간들은 기록으로 남고, 마음속 온기로 오래 머문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 곁에서 작은 다짐을 한다.

“잊혀도 괜찮아요, 아버지. 우리는 오늘을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늘 멋지고 근사했다. 바람 속을 달릴 때마다, 어린 나는 그 등 뒤에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다음 편 예고 — 겨울을 건너 봄으로」

눈발이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유난히 오래 창밖을 바라보셨다.

“이 눈이 녹으면, 엄마도 오겠지?”

그 한마디에 마음이 천천히 흔들렸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우리는 따뜻한 기억과 희망을 함께 느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을 따라 걷던 작은 손길과 웃음소리,

빵빵이의 졸린 몸짓까지 모두가 겨울 풍경 속 사랑의 흔적이었다.

그 겨울,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


작가의 말

아버지의 기억은 조금씩 흐르고 변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모양을 본다.

아버지의 손길, 눈웃음, 그리고 가끔 엉뚱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가족과 삶의 온기를 배운다.


딸아이의 웃음, 눈사람, 빵빵이의 따뜻한 숨결,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시간으로 이어져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기억이 희미해져도 사랑은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더 깊고 단단한 사랑이 남는다.


“잊혀도 괜찮아요, 아버지.

우리는 오늘을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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