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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벽난로

불빛 속의 겨울

by 최순옥
프롤로그: 겨울의 숨결 속에서

겨울이 깊어가면 마당의 공기마저 조용해진다.

새벽마다 하얀 서리가 장독대 위에 내려앉고,

얼었던 김치는 하루가 다르게 숨 쉬듯 익어간다.

바람은 차갑지만, 집 안에서는 늘 따뜻한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의자는 마당 한편, 벽난로 굴뚝이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겨울 내내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하곤 하셨다.

눈이 내리던 날에도, 경운기 소리가 마을 어귀를 울리면

그날은 꼭 장작을 해 오시던 날이었다.


경운기와 벽난로의 불빛

이른 아침, 아버지는 장작 할 준비를 마치고

경운기를 몰고 마을 뒷산으로 향하셨다.

겨울의 찬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경운기 소리 —

그건 가족의 하루를 여는 종소리 같았다.


산자락엔 하얗게 내린 눈이 나뭇가지를 덮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른나무를 골라 조심스레 다듬어

경운기 짐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서리가 내린 나무가 햇살을 받아 반짝일 때면,

그 모습은 참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마당으로 돌아오는 경운기의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은 마중을 나왔다.

“아버지 오신다!”

작은 발자국들이 눈 위에 찍히고,

엄마는 장갑 낀 손으로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나무를 가지런히 쌓으며 말했다.

“이건 불 붙일 때 쓰면 좋겠지?”

아이의 말에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셨다.


그렇게 쌓인 장작더미가 점점 높아질수록,

겨울의 마음이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벽난로의 불빛과 고구마 냄새

저녁이 되면 거실 벽난로에 불이 붙었다.

장작이 타오르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

그 불빛은 하루의 피로를 녹이는 음악 같았다.

엄마는 불 위에 고구마를 올렸다.

까무잡잡한 껍질이 부풀어 오르며 터질 듯할 때면

달콤한 향이 거실 가득 퍼졌다.


“이제 다 됐다.”

엄마의 말에 아이들이 손을 내밀었다.

후후 불며 한입 베어 물면,

뜨거운 김 사이로 달콤한 노란 속살이 입안에 번졌다.


그 순간, 세상은 조용해지고 따뜻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불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불은 마음으로 만져야 안 덴다.”


그 말이 불빛처럼 남았다.

겨울밤, 벽난로 앞 고구마 냄새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현관에 불이 들기 전,

신발이 차가워질까 봐 벽난로 뒤쪽에 가지런히 놓아두셨다.

출근길에 그 신발을 신으면,

아직 남은 불의 온기가 발끝으로 전해졌다.

그 따뜻함이 곧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멍이와 겨울의 그리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겨울,

우리 집에는 누런 강아지 ‘멍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 멀리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고,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면 멍이는 꼭 그 뒤를 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멍이가 다섯 달쯤 되었을 때 사라졌다.

나는 울며 밥도 먹지 않았다.

“아버지, 멍이 찾아주세요.”

며칠을 그렇게 울다 지쳤다.


다섯째 날,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멍이는 산에서 덫에 걸렸단다.

햇볕 잘 드는 곳에 묻어주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산만 바라보며 멍이를 불렀다.

그날 이후 한동안 아버지가 미웠다.


시간이 지나 알았다.

아버지는 내 마음이 다칠까 봐

가장 조용한 말로 위로하고 계셨다는 걸.

그날 벽난로 불빛이 유난히 따뜻했던 건,

아버지의 마음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빵빵이, 다시 온 따뜻함

멍이가 떠난 지 48년이 지난 겨울이었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가 되었고,

늘 깔끔히 정돈된 집 안에서

멍이 이후로는 다시는 강아지를 들이지 않았다.

다시 울기 싫다는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이 열여섯이 되던 겨울,

하루가 멀다 하고 말했다.

“엄마, 우리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

며칠을 버티다 결국, 딸의 성화에

나는 마음을 열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집엔

세 달 된 작은 강아지 ‘빵빵이’가 들어왔다.

처음엔 낯설고 번거로웠지만,

그 녀석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하얀 털 속의 작은 숨결을 안고 있자니

오래전 멍이가 떠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치 세월을 건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듯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양을 바꾸어,

다시 우리 곁에 머물러 줄 뿐이다.

우리 모두의 사랑 빵빵이
바다를 거닐다 나와 빵빵이 빵빵이의 억박자 걸음걸이
바다 그리고 빵빵이
바다 그리고 빵빵이


에필로그: 불빛 속의 겨울

밤이 깊어지면 벽난로의 불은 천천히 작아졌다.

불씨는 작아졌지만, 그 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마지막 장작 하나를 넣으며 말했다.


“불도 사람 마음 같아.

세면 금방 꺼지고, 은근해야 오래가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은 이불을 덮은 채 고구마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불빛이 가족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 온기가 오래도록 방 안을 채웠다.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장독대 위에는 하얀 눈이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경운기 옆 장작더미에도 눈이 쌓였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날의 불빛과 웃음,

멍이의 기억은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빛은,

봄이 와도 여전히

우리 집 마당을 따스히 비추고 있었다.


작가의 말

겨울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따뜻함이 숨어 있습니다.

경운기 소리, 벽난로의 불꽃, 고구마의 달콤한 향,

그리고 강아지들이 남긴 사랑까지

그 모든 것이 모여 ‘가족의 겨울’을 완성합니다.


불이 사그라져도 그 온기는 마음속에 남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불빛처럼

우리 마음도 서로를 비추길 바랍니다.


다음 편 예고 — 봄의 들판과 인삼밭

겨울이 물러가고, 마당에는 새싹이 얼굴을 내민다.

아버지는 장작 할 도구를 벽에 걸어두고

낡은 모자를 눌러쓴 채 인삼밭으로 나가신다.


흙은 아직 차가웠지만, 그 속엔 새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씨앗을 심으며

봄의 첫 숨결을 느꼈다.


다음 이야기는,

겨울의 불빛이 흙으로 이어지고

아버지의 손끝에서 새 계절의 생명이 피어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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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