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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Aug 21. 2024

<소설> 수염과 대머리 5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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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인처럼 지낸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수염의 길이가 손가락의 마디만큼 길었다. 잠깐의 방심으로도 수염은 자기 존재감을 과시했다. 수염이 이렇게 잘 자라기 시작한 것도 머리카락이 빠지면서부터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나는 모발을 죽인 범인으로 수염을 지목했다. 나는 수염이 자라면 무단으로 침입한 노숙자처럼 여기며 면도칼을 들고 잘라냈다. 이제까지는 그랬었다.

  쉐이빙 폼을 들고 거울을 보는데 수염은 생각보다 풍성하게 자라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이 아이들은 조금만 사랑을 주면 멋스러워질 것 같았다. 두피를 뚫고 듬성듬성 너저분하게 자라난 머리카락보다 훨씬 더 가지런했다. 무엇보다도 머리에서 눈동자를 제외하고 진한 색을 발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그래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이 아이들은 길을 잃었다. 만약 이 털이 정수리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다면 더러워 죽겠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아이도 나처럼 길을 잃었을 뿐 본질은 같지 않을까? 한 가닥의 머리카락으로도 내 DNA를 파악하는 것처럼 한 가닥의 수염도 마찬가지이다. 근본은 똑같은 털이다. 나는 열심히 흔들었던 쉐이빙 폼을 머리 위에 잔뜩 뿌렸다. 쉐이빙 폼 특유의 화끈거림이 두피에서 느껴졌다.     


  머리를 깔끔하게 밀고 수염을 살펴보니 훨씬 더 돋보였다. 미국 프로레슬링의 타이탄트론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슬러지 해머를 들고 나와 상대를 때려눕히고 양손에 맥주 캔을 들고서 입속으로 콸콸 들이붓는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보이는 듯했다. 그와 나의 닮은 점이라고는 수염과 대머리뿐이지만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을 코스프레할 때 수염과 대머리 정도 성의를 보인다면 다 된 거다. 수염 하나만으로도 이런 극적인 연출을 할 수 있다니. 지루한 인생에 활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방방 뛰며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중지를 펼쳐 들었다. 그렇게 경기를 시작했다. 바디슬램 스피어와 스터너 그리고 잭해머 같은 기술을 방구석에서 먼지와 함께 쌓여있던 대형 북극곰 인형을 상대로 썼다. 잭해머는 스톤콜드의 기술이 아니라 골드버그의 기술이지만 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골드버그도 대머리에 수염이 있으니까. 인형을 갖고 놀아본지도 침대 위에서 뛰어본지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영화 레버넌트에 버금갈 만큼 격렬했던 북극곰과의 레슬링 한판으로 방안에는 난리가 가득 찼다. 먼지가 눈에 보일만큼 방안을 떠다니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내쉬고 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반짝이는 두피에 땀이 맺히고 빠르게 뛰는 심장에 맞춰 숨을 내쉬니 살아있는 것 같았다. 겨드랑이에 털이 나고서 하지 않던 레슬링 놀이를 수염이 나고서 했다. 20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재미있었다. 엄마는 또 울겠지. 드라마가 슬프겠지.


  수염이 가진 매력은 단지 외형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력서를 쓰던 나는 도중에 코와 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력서의 자기소개서에 채울 문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턱을 쓰다듬는 내 모습이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자기 앞에 당면한 문제를 두고 머리를 감싸 쥐거나 긁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그건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신뢰하긴 어렵다. 하지만 수염은 어떤가. 골똘히 생각하는 현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몇 분 수염을 슥슥 문지르기만 하면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현자. 나는 어린 시절 똑똑해 보이고 싶어서 안경을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수염이 기르고 싶어 졌다. 근데 왜 사람들은 수염을 깎고 다니기 시작했을까? 사극만 해도 그렇다. 한반도의 조상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몸의 털을 함부로 깎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요즘 만들어지는 역사극의 주인공은 모두 기생오라비처럼 매끈하게 면도를 하고 나온다. 세상이 점점 남성성을 잃어가거나 어떤 남성성은 터부시 되고 있는 이유가 어쩌면 수염을 깎고 다니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     


  기른다는 건 의지가 담겨있는 말이다. 대상의 의지가 아니라 타자의 의지다. 개와 고양이 난초 그 대상을 나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낳은 부모의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기른다는 건 그런 거다. 대상은 그저 기름 당할 뿐이다.


  살면서 뭔가를 길러본 적은 없다. 딱 한번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서 길러본 적이 있었는데 유독 나를 잘 따르던 그 병아리는 밥상을 옮기느라 발아래를 살피지 못한 내 부주의로 내 발에 밟혀 생을 달리했다. 그 뒤로 함부로 뭔가를 기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른다는 건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수염은 내 몸에서 난다. 그 말은 책임의 측면에서도 부담이 없다는 거다. 물론 책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자식을 잘못 기르면 부모가 욕을 먹듯이 수염을 잘 못 기르면 수염 주인은 욕을 먹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말한다. 수염이 많이 자랐다. 잘라라. 좀 잘라라. 제발 좀 잘라라. 나는 말한다. 아니다. 내가 기르는 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한다. 이상하다. 거지 같다. 추잡하다. 더럽다. 흉하다. 징그럽다. 나는 다시 말한다. 머리도 못 기르는데 수염이라도 좀 기르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 주 월요일 학습지로 유명한 교0 그룹의 면접을 앞두고 있다. 간단한 문서작업과 사무 보조를 하는 일로 하루 다섯 시간만 일하는 시간제 일자리다. 남는 시간 소설을 쓰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아 지원을 했는데 서류 평가에 합격했다. 이력서에 붙인 사진에는 수염이 없다. 그건 이력서에 거짓을 기제 했다고 판단될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수염을 깎지 않고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소설의 결말도 결정이 될 것 같다.     

  나는 절대로 이 수염을 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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