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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Sep 23. 2024

<소설> 사지 1


열차 승강장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남자의 뒤로 아내와 딸이 뒤따르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남자는 아내와 딸의 얼굴이 얼마나 구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남자는 허공에다 빨리 오라며 소리치고는 기차에 먼저 올랐다.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중얼 대는 딸과 구겨진 얼굴의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좌석 번호를 찾아 움직였다.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 찬 좌석 가운데 비어있는 가족석 세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험하게 생긴 대머리가 앉아 있어서 포항까지 가는 길 내내 그와 마주 보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추석연휴에 온 가족이 오롯이 붙어 갈 수 있는 표를 구한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남자는 통로 쪽에 앉은 대머리 옆에 딸이나 아내를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자신이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부터 표 미리 준비 안 해두면 포항 안 갈 거야. 아빠는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으이그. 쯧쯧.”


  남자는 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 무료 와이파이 되나?”     


  표가 없어 가지 못할 것 같았던 고향에 가게 되는 일이 기쁜 건 남자 혼자뿐이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검색해보니 세 자리가 가깝게 붙은 좌석이 없었다. 한 자리 두 자리씩 따로 떨어져 가거나 서서 가거나 각기 다른 기차를 타야만 했다. 그렇게는 갈 수 없으니 혼자 다녀오라는 아내의 볼멘소리를 받아들이려던 차에 가족석이 뜬 것이었다. 기막힌 타이밍에 희비가 엇갈렸다는 표현은 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반대하는 감정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포항은 남자 혼자만의 고향이었다. 아내와 딸 둘 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남자는 아내에게 1년에 겨우 두어 번 가게 되는 고향이 얼마나 반가운지 이해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친정을 둔 아내는 집에 가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명절에 그 문제로 다툰 이후로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남자는 누군가를 이해시키기에 말주변이 부족했고 아내는 누군가를 이해하기에 마음이 넓지 못했다.


  어찌 됐든 고향으로 가게 된 남자의 마음은 가족의 눈치를 보면서도 살짝 들떠 있었다. 휴대폰 메시지로 자신이 얼마나 극적으로 세 장의 표를 구했는지에 대해 고향 친구에게 무용담을 늘어놨고 서울에서 친구가 온다는 메시지를 받은 고향친구는 반가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야 이기 얼마만이고? 오늘 저녁 시간 되나? 간단하이 맥주나 한 잔 하자.”


  “어 그래. 일단 집에 갔다가 상황 봐서 나가께. 잘 지내제?”     


  기차 안에서 통화하는 남편이 부끄러운 건지 사투리를 쓰는 남편이 부끄러운 건지 아내는 잔뜩 찡그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기차 안이라서 통화하기가 그렇다. 메시지 보내꾸마. 오야. 드가제이.”


  전화를 끊자마자 딸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빠 오늘 밖에 안 나간다 했다. 나가기만 해 봐.”


  “아빠가 정말 친했던 친구 삼 년 만에 만난단 말이야. 저녁에 잠깐만 나갔다가 금방 올 거야.”


  “지가 지 입으로 한 말도 못 지키냐? 그치 엄마? 아빠 나가면 나 다음부터 포항 안 갈 거야. 알아서 해.”     


  그러지 않아도 몇 년 후에는 속 편하게 혼자 다녀 올 심산이었다. 딸아이가 이제 열두 살이니 공부를 핑계 대고 엄마와 서울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가족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가는 일이 흡사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기야 목이 너무 마르네. 들어올 때 자판기 보이던데.”     


  통로 쪽에 앉은 험한 인상의 대머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남자는 맞은편 통로 쪽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넌지시 자신의 상태를 전했다.     


  “카트 오겠지.”     


  아내는 짧게 대꾸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긴장이 풀리고 뛰어 온 탓에 목이 말랐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어서 남자는 그냥 참기로 했다.     


  열차가 광명역을 지날 때 까지도 카트는 보이지 않았다. 목이 말랐던 남자는 지나가는 열차 직원에게 카트가 언제 지나가는지 물었다.     


  “이제 KTX는 카트 운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객님.”     


  직원의 말을 들은 딸이 아빠에게 돈을 달라 말했다.


  남자는 지갑에서 넉넉하게 만 원권 지폐를 꺼내줬다. 잠시 후 돌아온 딸아이는 자기 몫의 과자 두 봉지만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잔돈은 자신의 주머니에 따로 챙겼다.


  “야. 아빠 목마르다고 했는데 물은 안 사 왔어?”


  “몰라. 아빠 먹을 거는 아빠가 갔다 와.”     


  남자는 체념하고 딸이 사 온 과자를 집어 먹었다. 짭짤한 과자를 먹다 보면 침이 고여 목이 덜 마를 것 같았다. 딸은 과자를 집으려던 남자의 손을 치면서 말했다.


  “내가 사 온 거거든? 내 과자 먹지 마. 아빠가 가서 사다 먹어.”


  “지윤아 그러지 말고 남은 돈으로 물도 좀 사고 과자도 더 사와.”


  “남은 돈 없는데?”


  “만 원이나 줬는데 과자 두 개 사고 남은 돈이 왜 없어?”


  “없어. 이거 두 개 만원이야.”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는 그저 허허 웃으며 신발을 벗은 발로 딸아이를 찌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갔다 와. 아빠 목마르단 말이야.”


  “아 더러워. 냄새 나 저리 치워. 어? 말 안 듣네? 치우라고 했다?”     


  남자는 딸의 짜증에 그저 허허 웃었다.


  딸의 말투가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자타공인 딸바보였던 남자는 최근 들어 딸 앞에서 그냥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험하게 생긴 대머리가 자신의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물 좀 드세요.”     


  남자는 옆 사람이 그간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을 거라는 생각에 머쓱해졌다. 남자는 대머리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감사인사를 하고 물을 받았다. 물을 마시며 언뜻 보니 대머리는 눈이 맑아 보였다. 피부도 좋았고 다듬은 수염도 멋스러웠다. 세심하고 착한 사람 같아 보였다. 목을 축이고 생수통을 돌려줬다.


  남자는 생수통을 돌려받으며 웃는 대머리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이해한다는 표정처럼 느껴졌다. 대머리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설명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을 대머리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조용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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