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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Sep 30. 2024

<소설> 사지 3


●          


  퇴근을 하고 집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 까지도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따라다녔다. 집에 도착하고 긴장이 풀리자 통증이 좀 더 크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집중을 할 때면 통증이 조금 덜했지만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여전히 통증은 그 자리 그 부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남자는 조금 짜증이 났다.


  남자는 불이 꺼진 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에슐리라고 찍힌 카드 승인 내역서가 문자 알림으로 전송됐기 때문이었다. 샐러드, 식사, 디저트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뷔페식당이었다. 남자도 그곳의 음식을 좋아했다. 남자는 그 식당에 가면 최소 두 접시 이상 먹고 오는 순살 치킨을 떠올렸다. 허기를 느꼈고 자신도 나름의 정찬을 차려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맥주를 꺼냈다. 냉동실에서 냉동된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으면 약간의 추위를 느낄 정도였지만 남자는 뜨거운 국물과 맥주의 알코올로 몸을 데웠다. 스마트폰으로는 UFC 중계를 재생시켰다. 응원하는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용한 것이 싫었다. 주먹이 오가며 서로 때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머리가 멍해지고 편안해졌다. 컵라면을 비우고 맥주 한 캔을 다 먹어갈 때쯤 보일러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밖에서 스마트폰의 원격 기능으로 보일러를 가동시켰다. 30분 안으로 아내와 딸이 집으로 온다는 뜻과 같았다.


  그는 맥주 한 캔을 더 땄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와 함께 씹을 거리를 찾다 보니 크래미가 눈에 띄었다. 생선살을 발라 향미를 첨가해 킹크랩 맛을 내는 어묵이었다. 일반 어묵보다 비싸긴 했지만 식감이 좋아서 딸이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눈치 볼 딸이 없으니 하나씩 까먹는 게 더 맛있게 느껴졌다. 술 먹는다며 핀잔 줄 가족이 없어서인지 흥이 더 났다.

  남자는 빈 맥주캔 두 개를 분리수거함에 넣고 마치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맥주캔 하나를 더 땄다. 그때를 맞춰 가족들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찍 왔네. 저녁은 먹었어? 나는 라면 먹었어.”


  “우리도 먹고 왔어.”


  아내는 남편이 앉은 식탁을 훑어보면서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내 크래미 왜 먹었어?”     


  퇴근 후 처음 만나는 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내 크래미 왜 먹었냐는 말이었다. 더욱이 남자에게는 그 말투가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꽤 높은 데시벨의 목소리가 평온하던 남자의 귓전을 파고들어 균열을 일으켰다.     

  “이게 왜 네 크래미야? 온 가족 다 먹으려고 산거잖아.”


  “내 크래미야. 내가 마트에서 직접 담은 거거든? 왜 허락도 없이 먹어? 그리고 내가 술 먹지 말랬잖아.”


  “아빠 돈으로 산거잖아. 담기만 한다고 네 거야?”


  “아니거든? 엄마가 샀거든? 아 내 크래미 왜 먹었냐고.”


  “엄마 돈이 아빠가 벌어서 주는……. 아휴 야 됐다.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     


  남자에게는 유치한 싸움으로 인식됐다. 더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스마트폰에 시선을 뒀다.     


  “아 진짜 먹지 말라고!”     


  딸은 아빠 앞에 놓인 크래미 봉지를 채로 낚아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던져놓고 닫았다.     


  “야! 이지윤 너 아빠한테 뭐 하는 짓이야?”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딸도 주눅 들지 않고 눈을 흘기며 아빠를 쳐다봤다. 대치 상황에서 남자는 딸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그때 옷을 갈아입은 아내가 나와 상황을 정리했다.     


  “이지윤 방에 들어가서 숙제해. 어서.”     


  딸은 엄마의 말에 흘기던 눈을 거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실 소파로 가면서 나지막한 한마디를 했다.     


  “눈에 보이면 다 먹어요. 애 먹는 걸 왜 먹어? 그리고 술 좀 안 보이는데 가서 먹지.”     


  보통날이었으면 그냥 넘어갈 말이었다. 평소의 남자라면 아무렇지 않을 말이었다.

  눈 뜨자마자 시작되어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오른쪽 어깨의 통증. 불쾌한 기분으로 출근 한 아침. 직장에서 받는 일정량의 긴장감. 퇴근 후 혼잡한 지하철에서의 시달림. 누적된 피로. 자기만 빠져 있던 에슐리. 뱃속에서 부대끼는 라면과 맥주 그리고 크래미. 맥주 세 캔으로 적당히 오른 취기. 아빠를 힐난하던 딸의 앙칼진 목소리. 흘겨보던 딸의 눈에서 느껴지던 미움과 불만. 그 모든 상황과 상관없이 스마트폰에서는 붉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선수를 파운드로 무차별 가격하고 있는 장면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흥분된 목소리까지 압력이 되어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거기에 아내의 말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상심과 섭섭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깃털처럼 나지막이 내려앉은 한마디가 더해지자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화가 터져버렸다. 열거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상황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그를 비켜갔었더라면 남자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할 일은 없었다.     


  남자는 반 이상 남은 맥주 캔을 정면에 있는 냉장고를 향해 힘껏 던졌다. 냉장고에 부딪힌 맥주 캔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방에 맥주가 튀고 바닥을 구르는 맥주 캔은 흰 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맥주 캔에 맞은 냉장고는 움푹 파여 상처가 났다. 단 몇 초 만에 집안 풍경이 달라졌다. 탄산을 머금은 맥주는 폭탄처럼 터졌다. 남자는 자신이 일으킨 상황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기서 움츠러들면 정말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더는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쳤어?”


  “안 미치게 생겼어? 네가 나를 우습게 아니까 딸까지 저따위로 나오잖아.”


  “그거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왜 그래? 진짜 미쳤어?”


  “미쳐? 말조심해 씨발. 애를 어떻게 가르쳤으면 에슐리가서 배 터지게 처먹고 와서도 식탐을 부려? 애들 먹는 거? 맥주 안주로도 딱이라고 써져 있는데 내가 몇 개 먹은 게 그렇게 아깝냐? 씨발 힘들게 돈 벌고 들어왔더니 들어오자마자 첫마디가 내 크래미 왜 먹었어? 그게 인사야? 내가 이런 거 하나도 먹을 자격이 없냐? 내가 이런 꼴 당하려고 월급통장 넘겨줬어? 네가 날 얼마나 병신으로 알면 애까지 저래. 어?”     


  ‘허허. 누굴 닮아서 애가 저렇게 욕심이 많아?’ 딸이 예상한 아빠의 반응이었다. 군소리에도 꾸역꾸역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방으로 들어가 잠드는 것이 아내가 예상한 남편의 반응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남편의 반응은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오늘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던 아내와 딸에게는 벼락같은 고함이었다. 무기력하고 무던했던 남자가 뻘겋게 터질 듯 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크래미 때문에. 고작 크래미 때문에. 두 여자는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나운 짐승을 만난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겁먹은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화장실 샤워부스에서 물을 세게 틀어놓을 때만 하던 말들을 거실에서 토해냈다. 그러는 사이 딸은 겁에 질려 울었고 아내는 할 말을 잃었다. 남자는 화를 다 토해내고서 겉옷을 챙겨 집을 나갔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본인도 몰랐다. 아내도 몰랐고 딸도 몰랐다. 밖으로 나간 남자는 자정을 훨씬 넘겨서 들어와 아무 말도 않고 침대로 가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아무 말도 않고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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