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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Nov 21. 2022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 서유미 작가의 단편소설집

하루치의 좌절과 고충에 대하여

가끔 소설집에 꽂힐 때가 있다.  


장편소설을 읽을 때 필요한 어떤 commitment (한 권을 다 읽겠다는 결심)이 좀처럼 생기지 않을 때는 단편집이 훌륭한 차선택이다.  단편소설집의 또 다른 장점은, 내가 접해보지 않은 작가에 대하여 좀 더 용기 있게 덤벼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독자가 한국 책을 접하는 방법은 ebook이 전부다.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들춰보고 고를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작가의 책을 고를 때는 단편집을 일단 먼저 결제한다. (읽어보고 좋으면 그 작가의 장편도 읽어보겠다는 깍쟁이 심사다.)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 여성작가의 책이 읽고 싶었던 때라 이것저것 섭렵하던 중이었다. 서유미 작가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정말 좋은 책이어서 이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종이책도 사서 들고 왔다.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다.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읽고 또 읽어도 계속해서 가슴의 울림을 주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먼저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의 첫 단편인 "에트르"에서  특별히 사랑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우리는 천장을 쳐다보며 하루치의 좌절과 고충을 가만히 털어놓았다.

("에트르" 中 -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 서유미 작가)


인간에게 '잠'이라는 것은 하루치의 좌절과 고충을 잊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닐까?  마흔이 넘은 지금 나의 "하루치의 좌절"은 더 작아졌을까?  가벼워졌을까? 아니면 여기도 "하루치 좌절 총량의 법칙" 따위가 존재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20대에 느낀 하루치의 좌절은 40대가 되어 모양이나 형태가 바뀌어질 뿐, 작은 병에 꼭꼭 눌러 담으면 똑같이 들어가는 양이 아닐까?


그동안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 했다.

("에트르" 中 -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 서유미 작가)


나는 나의 20대를 기억하며 소설 속의 그녀들이 가슴 아팠다.  '줄임'이 '넉넉함'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핍'으로 귀결됨이 나를 아프게 한다.  20대 초반, 짧은 서울 생활을 했다. 캐나다에서 학부를 마치고 법대에 가기 전, 1년 반 정도의 서울살이를 했다.  땡전 한 푼 없이 서울살이를 시작했었다.  처음엔 친구 집에 얹혀살았고, 몇 달간 원룸을 얻을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식비를 줄여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젊음을 가졌으나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던 시절.  (금전적인 안정에 대한 나의 집착은 아마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김밥으로 세끼를 때우던 그때쯤 시작된 것 같다.  시간과 돈에 쫓기던 시절의 기억이 흉터처럼 남아 지금의 '일하는 기계'가 된 것이 아닐까.)


서울의 지하철은 언제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2호선 어딘가에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스물셋의 내가 있을 것만 같다.


주위 사람들도 다 시간을 쪼개고 욕망을 유보하며 살았다.

("에트르" 中 -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 서유미 작가)


언젠가 유보된 욕망을 풀 수만 있다면야, 그다지 슬픈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보'가 아닌 '상실'이고 '포기'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지금도 서울 어느 한 귀퉁이에서 누울 곳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그래도 청춘은 아름답다'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쓰려 눈물이 난다.  그 시절의 나도 가엾고, 너 또한 가엾다.



이태리산 라마카 프로세코

책과 어울리는 술로 소주를 골랐다가, 달콤한 라마카 프로세코로 맘을 바꿨다.  우리네 인생도 쓴데 굳이?  저렴하지만 기분 내기에는 충분한 라마카 프로세코. 살짝 달고 향긋하면서 탄산도 있는 가벼운 스파클링 와인이다.  에트르에 등장하는 자매에게 선물하고 싶은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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