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보스’는 그 누구보다도 중요하다. 나에게 업무 기회를 주거나 뺏을 수도 있고 내 퍼포먼스를 평가하기도 하는 등, 내 회사생활의 ‘성장'과 ‘인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간 여러 회사에서 여러 보스를 만나 오면서 종종 어떤 보스가 좋은 보스인지 생각해보곤 했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회사 생활의 주요 고비고비마다 내가 만났던 보스들을 떠올리며 그 안에서 보스의 덕목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내가 D와 같은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D의 팀이 아닌 다른 팀 소속이었다. 때문에 입사 후 일 년 정도는 D와 업무적으로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당시 D에 대한 내 인상은 ‘윗선의 총애를 받는 영혼 없는 기획자’ 정도였다. 남 험담 하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퍼뜨린 말들의 영향이었다.
입사 일 년쯤 뒤, 나는 D의 팀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D의 팀에서 신규 모바일앱을 출시해 인력 지원이 필요하게 되는 바람에 기존에 서비스 기획 경력이 있던 내가 D의 팀으로 차출된 것이다. D의 팀원들 모두가 이미 바쁘게 자기 몫 이상을 해내고 있었고 나도 파견 첫날부터 바로 현업에 투입되어 야근을 시작했다.
나는 해당 모바일앱의 소셜 기능 강화를 위한 신규 업데이트 기획을 맡았는데, D는 내 업무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일견 관심이 없는 듯도 보였다. D의 태도는, 큰 그림은 어차피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상태였기에 각 기획자들이 맡은 부분을 상세히 잘 기획하고 디자인과 개발 진행을 잘 챙기며 일정 내 문제없이 출시하도록 관리할 수 있으면 노터치(No-touch), 만약 그 과정에서 이슈가 있는 경우에만 본인이 개입하겠다는 정도의 스탠스인 듯했다. 마이크로매니지먼트(micromanagement)에 가까웠던 원 소속 기획팀의 분위기와 많이 달랐다.
놀라웠던 건 팀이 너무 잘 굴러갔고 프로젝트가 꽤나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모두들 야근 릴레이를 하긴 했지만 신규 모바일앱을 출시하고 시장에 안착시킬 때까지는 많은 IT 회사들이 크런치 모드로 일하는 게 업계 관행이기도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고강도의 프로젝트 일정 속에서 마주하고는 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 간의 갈등, 정치질, 남 탓, 책임전가, 도망(?) 등등, 종종 보던 꼴사나운 장면이라고는 마주할 일 없이, 무난하고 평탄하게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몸은 좀 혹사스러웠지만 우리가 출시한 모바일앱이 시장에서 반응을 얻고 사용자를 끌어모으는 데 도취되어 엔도르핀이 솟아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분란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다들 프로답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하고 그 결과로 일이 착착 되어가는 느낌에, 정신적으로는 한없이 평온함을 느꼈다. 이후 해당 모바일앱이 시장에서 더 좋은 반응을 얻으며, 나는 아예 D의 팀으로 소속을 옮기고 이후로도 몇 년을 함께 일하며 성장, 성공, 인정을 모두 맛보는 충만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스로서 D의 매직은 무엇이었을까.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 ‘따뜻한’ 팀장은 아니었던 탓에 몇몇 사람들은 농담 삼아 D를 로봇이나 AI라고 불렀는데 D 특유의 담담하고 건조한, 어찌 보면 차가워 보이거나 무심해 보일 수 있는 그 태도가 D의 독특한 개성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특유의 담담하고 건조한 태도는 모든 팀원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D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은 서로 적당히 경쟁하면서도, 일이 잘 풀릴 때에도 심하게 들뜨지 않고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도 침착하게 일을 잘 풀어가는 데만 집중하는 D의 모습을 닮아 갔다. 팀원들에게 일을 분배하고 맡은 일을 스스로 완성해 내도록 내버려 두는 그의 무심함은 팀원들을 자기 몫을 충실히 해내는 데 집중하게 만들고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해 내는 ‘프로’로 만들었으니, 그 ‘무심함’은 어찌 보면 ‘신뢰’ 혹은 ‘기대’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팀원들이 시니어였기에 가능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D의 또 다른 진가는 연말에 드러났다. 연말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각 팀원들의 성과 평가와 연봉 인상, 인센티브, 승진 등이 결정되는 시기였다. 회사 내 몇몇 호사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던 대로 D는 경영진의 신뢰를 받는 팀장이었고 실제로도 D의 팀에서 출시한 모바일앱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기에 D는 회사로부터 팀원들의 몫을 확실히 받아냈다. 따뜻한 말로 동기부여 해주는 일은 없었지만 연봉인상으로, 인센티브로, 승진으로 보다 확실히 챙겨주는 팀장이었다.
D와 일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무심하게 팀원들을 챙겨주던 D가 종종 생각난다. D의 무심함 안에서 다들 A부터 Z까지 스스로 해내는 프로로 성장하고, 함께 성공하고, 성공의 과실을 함께 나눌 수 있던 그 시절, 우리를 이끌어준 그 시절의 보스, D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E를 떠올리면 늘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플레이어로서 E의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E가 과연 좋은 보스였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인, 그런 두 가지 마음.
E는 분야를 막론하고 뭐든 스스로 탐구하고 공부해서 빠른 시간 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스스로 성장하는 형태의 일잘러였다. 때문에 이미 수년간 회사 내 여러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해결사노릇을 해왔다. 그게 E 본인의 전문 분야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몇 날 며칠이고 파고들어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교육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서는 게 E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처음 입사한 직원이나 다른 팀에서 옮겨온 직원들은 E에게 직접 교육을 받고 E가 일하는 걸 옆에서 보고 배우며 빠르게 성장해 갔다. E의 영향으로 팀 전체의 업무 역량이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확실히 그 존재만으로도 팀원들을 성장시키는 E는 누가 뭐래도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팀 전체의 업무 역량이 일정 수준으로 올라서고 난 다음이 오히려 문제였다. 개개인의 성장을 통해 팀 전체의 역량이 안정되어 가는 만큼 다음 단계는 팀원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치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그 성공의 과실을 인정받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할 터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팀원들이 하나 둘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E를 보스로 두고 일을 해봤던 사람들과 내가 느낀 바를 종합해 보면, 공통적으로는 이랬다. 일단 E는 타인에 대한 평가에 한없이 박했다. 어리바리한 팀원이건 곧잘 하는 팀원이건 간에 E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누군가 120%, 150%를 해내더라도 200%를 해내는 본인에 비하면 다들 평범하고 고만고만해 보여서였을까. 칭찬의 말 한마디던 성과평가와 승진의 형태로 주어지는 보상이든 간에, 이대로 있다가는 좀처럼 제대로 된 인정을 받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에, 일 잘하는 팀원들은 불안해했다. 또한, 대부분의 일은 E가 이미 내린 정답대로 흘러갔다. 각자 다른 개성과 역량을 가진 팀원들이 내놓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살필 여유가 E에게는 없었다. 팀장이면서도 실무를 놓지 않는 플레이어로서 이미 어마어마한 실무를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본인의 방식대로 업무를 풀어가고 싶어 하는 시니어 직원들은 E가 이미 내려놓은 정답을 실행하는 역할만 하게 되는 상태가 지속되자, 못 견뎌했다.
나 역시 E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E에게 감탄했지만 플레이어서의 역량과 관리자로서 역량은 다르다는 점, 둘 다 잘하기는 참 어렵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낀다. 뛰어난 역량과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E라는 큰 우산 아래에서 어린 묘목들은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지만, 그 큰 우산의 큰 그림자에 가려 결국 그 우산을 뚫고 나갈 만큼은 크지 못하는, 그런 아이러니 말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보스, F에 관해 돌아본다. 앞서 말한 대로 내 대부분의 이직은 성장을 위한, 성공을 위한, 인정을 위한 투쟁, 즉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보다 최적의 회사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이직에는 ‘내가 버티고 감당할 만한가’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긴 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의 이직은 그랬다. 하지만 단 한번, 미래를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하려는 순수한 동기보다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다소 불순한 동기에 지배당해 이직을 추진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F 팀장 치하에서 회사 생활을 할 때다.
보통 대기업은 연말에 이루어지는 정기임원인사에 따라 조직 개편과 팀 개편도 함께 이루어지고는 하는데, 그 해 연말, 그동안 지지고 볶으며 합을 맞추며 이제는 어느 정도 팀워크가 다져졌다 싶었던 우리 팀이 다른 팀과 합병이 되며 새로운 팀장으로 F가 왔다. 팀원들 대부분이 기획자였고 우리 팀이 맡은 역할도 온라인 서비스 기획 및 운영인 실무형 팀이었음에도, F는 유일하게 전략팀에서 서비스팀장으로 내리꽂아진 케이스였다.
두 개의 팀이 인력도 조정되고 업무도 조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팀장으로서 F가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F에게 그런 실무적인 일들은 관심 밖에 있는 듯했다. 컨설팅 회사에서 파견 온 컨설턴트 마냥, 오직 전략 보고서 쓰는 일에만 집중했다. 팀이 맡고 있는 메인 업무가 뭔지 알아보려는 자세는 1도 없이, 본인이 전략팀에서 해오던 전략 수립과 경영진 보고 업무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듯했고 보고할 재료를 찾아오라며 팀원들을 닦달했다. 팀원들은 당장 다음 달 서비스 업데이트를 위해 신규 화면 기획과 시스템 기획, 운영 협의, 디자인 협의, 개발 협의, 테스트로 정신없는데 그럴싸한 말들로 가득한 보고서를 써내라 닦달이었다. 보고서를 써내지 않으면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팀의 주 업무에 대해, 회사가 이 팀에 기대하는 역할에 대해, 팀장과 팀원 간에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F는 팀원들 간의 경쟁을 부추겼다. 응당 납득이 가는 주 업무로 경쟁을 유도했다면 모르겠는데, 본인과의 친분이나 정치력을 두고 경쟁하길 원했던 것 같다. 이 팀원에게는 이렇게, 저 팀원에게는 저렇게 다른 말을 전하며 대리가 과장을, 과장이 대리를 불신하게 만들려는 듯했다. 업무로 통제할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팀원들을 통제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F를 떠올리면 ‘의뭉스럽다'는 한 단어가 떠오른다.
F가 어떤 연유로 전략팀에서 실무팀장으로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게도 본인에게도 팀원들에게도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F가 팀장으로 있는 반년동안, 팀원의 1/2이 팀 이동 혹은 퇴사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웬만해서는 잘 이직하지 않는 공채 출신 대리나 과장급을 포함해서 말이다. 나 역시 이 시기에 이직을 결심했다. F는 6개월 만에 팀장에서 물러나 다른 팀으로 이동했다.
분명 본인만의 남다른 능력이 있었기에 회사의 인정을 받아 실무팀 팀장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F는 기존 팀에 팀장으로 와서 팀원들이 하는 업무에 대해 배우고 알아가려는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팀이 해오던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외면한 채 본인이 이전 팀에서 하던 업무만을 이어가려 했다. F는 팀에 녹아들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게 아닐까. 짧게나마 실무팀을 경험했다는 이력을 경력에 한 줄 추가한 채, 전략부서로 돌아갈 전략을 짜고 있었던 게 아닐까. 회사는 팀이 해오던 업무와 기능에 대해, 팀원들의 고군분투에 대해 존중할 마음도 태도도 준비 안된 F를 팀장으로 내리꽂음으로써 능력 있는 팀원 네다섯 명이 진저리를 치며 회사를 떠나게 만들었다. 고로, 회사생활에 팀장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F를 떠올리며 새삼 드는 생각이다.
그간의 회사생활에서 인상적이었던, 서로 다른 스타일의 세 보스를 돌이켜보며 '좋은 보스'의 덕목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본인의 뛰어난 실력으로 팀의 초기 성장을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좋은 보스는 '최고의 플레이어'가 아닌 '최적의 판을 깔아주는 관리자'여야 하지 않을까. 팀의 역량과 역할을 정확히 인지하고 팀원들에게 업무를 완수할 수 있는 '신뢰'를 부여해야, 그 신뢰가 만들어내는 자율적인 업무 환경에서 팀원들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 즉 성공 과실의 분배가 투명하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팀원들은 성장, 성공, 인정의 균형 속에서 충만한 회사 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보스는 팀원들이 스스로 빛나도록 돕는 무대이자 조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