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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큰 회고(Retrospective)

by Aaaaana

2025년 여름, 여덟 번째 퇴사 날. 회사 노트북을 반납하고 에어컨 바람이 맴돌던 차갑고 건조한 사무실 공기를 뒤로한 채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에서 마주한 싱가포르의 축축하고 끈적한 습기를 느끼며, 나는 비로소 무한한 자유를 실감했다.


2007년 겨울, 얼떨결에 회사원이 된 이래로 한국에서 넷, 싱가포르에서 넷, 총 여덟 곳의 회사를 거쳐왔지만 이직할 곳을 정해놓지 않거나 재취업할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로 회사를 그만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누군가 퇴사의 이유를 묻는다면 당장은 ‘회사 밖에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라는 모호한 대답밖에 내놓을 게 없다. 하지만 그‘이것저것'을 하기 전, 아직 회사의 기억이 꽤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 어쩌면 다시는 다닐 수 없거나 다니지 않을 그 ‘회사’에 대해 한번 냉정하게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IT 업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 중 하나인 ‘애자일(Agile)’에는 ‘회고(Retrospective)'라는 기법이 있다. 말 그대로,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소프트웨어 개발과정에서 한 ‘스프린트(Sprint, 주기)’가 끝날 때마다 개발팀이 다 같이 모여 해당 개발 스프린트에서 잘된 점, 개선할 점, 배운 점 등을 허심탄회하고 냉정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깨달은 것들을 다음 개발 스프린트에 반영하여 전체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애자일 회고'를 내 8번의 회사생활에 적용한 기록이다. 두 개 나라 여덟 개의 회사에서 겪은 회사생활이라는 이 거대한 ‘스프린트’를 일, 사람, 돈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회고해 보려는 시도이다. 일의 의미와 성공과 실패, 사람에게서 배운 것과 잃은 것, 돈의 의미와 무게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담으려 노력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를 회사 생활을 후회 없이 정리하고 다음 스프린트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지난 수년간 하나의 회사와 작별할 때마다 사실 ‘작은 회고’를 해왔다. 한 회사만 수십 년 넘게 다닌 분들에게는 민망한 얘기지만, 그동안 나에겐 무려 일곱 번의 회고의 기회가 있었고 이번이 여덟 번째.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 회사만을 놓고 하는 ‘작은 회고’가 아닌, 지난 회사 생활 전체를 아우르는 ‘큰 회고'를 해보려 한다. 내일 일은 모르는 거라 하지만, 어쩌면 이 여덟 번째 회사가 내 마지막 회사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면 이 챕터를 잘 마무리하고 다음 챕터로 잘 넘어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이런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회사를 다니며 내 거취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 특히 퇴사나 이직을 고민할 때마다 - 늘 품어왔던 한 가지 질문은 ‘무엇이 나를 이 회사에서 일하게 만드는가'였다. 한마디로 ‘동기부여’ 혹은 ‘회사생활의 동력’에 관한 정의이자 이 회사의 무엇이 이 공간에서 이 사람들과 계속해서 일하게끔 나를 부스트업 해줘 왔는지, 혹은 해줄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동기부여고 뭐고 먹고살기 위해 다니는 게 회사 아니냐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다. 우리는 회사원으로 고용되는 순간부터 내 소중한 시간을 팔아 그 대가로 돈을 받기로 갑과 을의 굳은 약속을 하고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날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니 ‘돈'은 너무나도 당연한 회사 생활의 동력이자 필요조건이다. 다만, A 회사와 B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정의 순간에, ‘돈’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가 그 결정을 뒤바꿔 심지어 더 적은 연봉을 받고 이직하는 경우들도 숱하게 봐 왔으니, 회사원이라는 인간들의 마음은 그저 ‘돈'으로 움직인다고 말하기엔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세세한 기준이나 비중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뒤돌아보면 내 경우에는 늘 세 가지 축, 즉 일, 사람, 돈을 기준으로 ‘회사생활의 동력'을 따져봤던 것 같다. 비록 시간을 팔아 월급을 받는 회사원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거나 배울 수 있는지, 월급으로 주어지는 노동의 대가가 합당한 수준인지 말이다. 고비고비마다 이 세 가지 축으로 현재의 회사생활을 분석하다 보면 뿌연 안갯속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덟 개 회사를 거치며 만난 다양한 동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며 제법 공감을 얻어왔으니 나만의 특수한 기준은 아니리라 믿는다.


나라는 회사원의 수년간의 회사생활을 기록하는 연대기이자 회사에서 한 일, 만난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받은 돈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큰 회고’가 동시에 다른 모든 회사원들에게 건네는 질문이 되기를 바라본다. 오늘도 소중한 시간을 팔아 차곡차곡 월급을 모으고 있는 모든 회사원들에게 작은 공감, 위로, 쓸모가 되기를 바라며 나의 회고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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