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업계와 홍익인간
2010년 여름, 대리로 입사한 세 번째 회사에서 본 사수의 그 얼굴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입사 첫날,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통성명을 한 직후 ‘대리님은 여기서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묻는 질문에 ‘기술을 통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을 하는 부사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얼굴을.
어쩌면 통상의 업무 분장을 위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고 가벼운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당신에게 이 업계는, 이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걸로 들렸고, 그리하여 저런…… 다소 닭살 돋는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
표현은 좀 오그라들지만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습성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왕이면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희망한다. 그리하여 통상 하루 8시간 이상 혹은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수를 보내는 이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이왕이면 ‘돈’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런 욕구가 남들보다 좀 더 강한 편인 것 같다. MBTI 성격 검사에서도 ‘내면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성격 유형’인 INFJ라고 하니.
어릴 때의 꿈은 변호사였는데 문과생으로 제법 공부를 잘해서이기도 했지만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삶의 지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인 것도 같다.) 실제로 법대를 나와 일 년 정도 사법시험을 준비한 적도 있으니 성인이 되고 나서도 몇 년간은 그 꿈을 간직했나 보다.
하지만 밀레니엄 첫 학번인 00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법 공부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자꾸 관심이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나도 기술이 만들어내는 그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으니.
80년대 초반생이라면 공통적인 경험이겠지만, 종이 신문의 TV 편성표에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찾아보던 초등학생 시절을 거쳐, 친구와 삐삐 번호를 교환하고 PC 통신 동호회에 가입해 익명의 타인들과 취향을 공유하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광통신망이 깔린 초고속 인터넷 환경에서 개인 홈페이지, 다음 카페, 프리챌, 싸이월드를 즐기는 성인이 되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웹 2.0’이라는 흐름, 즉 참여, 개방, 공유의 흐름을 바탕으로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생산하고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웹 트렌드가 널리 확산되었고 그 기반 위에서 개인이 미디어가 되는 시대, 그 미디어를 통한 지식 공유와 집단 지성의 확산, 기술의 발전이 사회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현상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의미에 집착하면서도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었던 나에게 2000년대 IT 업계가 만들어내는 흐름은 이렇듯 흥미로웠고, 온라인 카페나 커뮤니티를 통해 사람들이 연결되고 자유롭게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광경을 보며 막연하지만 나도 그 기반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도서관에 앉아 세상과 단절된 채 사시 공부에 매진하는 생활은 1년 남짓으로 미련 없이 끝내고 2006년, 나는 진로를 변경해 국내 한 대학원 디지털 미디어 학부에 입학했다. (바로 취업해 IT 업계로 나가고 싶기도 했으나, 사실 바로 취업이 안 됐다……) 대학원에서는 게임, 영화, 인터넷 뉴미디어를 망라하는 당대 모든 디지털 매체와 그 콘텐츠 양식이 연구 대상이었고, 2년 간 정말 즐겁게 공부하고 실습하고 창작하며 석사 논문을 쓰던 와중인 2007년 겨울, 국내 한 IT 회사의 서비스 기획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다.
첫 회사와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최근 몇 년간 IT 업계에서 화두가 되었던 메타버스(Metaverse)*와 관련 있다. 메타버스는 사실 꽤 오래전에 정립된 개념으로, 2007년 당시 우리 대학원 연구실의 주요 연구 대상 중 하나였다. 때문에 석사 논문을 쓰면서도 메타버스 관련 여러 연구와 프로젝트들을 병행했는데 졸업 무렵, 마침 당시 메타버스를 상용화한 대표적인 서비스였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가 한국 서비스를 시작했고 그 현지화를 담당하는 국내 한 IT 회사의 신입 기획자 채용에, 메타버스와의 연으로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는 ‘회사원'이 되었다.
월급은 당시 IT 회사 신입 기획자 기준에 좀 못 미쳤던 것 같지만, 일은 꽤 즐거웠다. 세상에 없던 것을 앞서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에 스스로 도취되기도 했고 내가 운영하는 서비스에 사람들이 접속해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서로 연결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제법 뿌듯했다. 결과적으로는 너무 이른 3D 아바타 서비스였기에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고 정체기를 거쳐 이른 정리 수순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첫 회사에서 맛본 작은 단맛, 즉 내가 만든 온라인 서비스를 누군가 직접 사용하며 주는 긍정적 피드백에서 느끼는 성취감이라는 열매가 IT 업계의 서비스 기획자라는 직군으로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다.
그동안 나는 IT 회사의 서비스 기획자로 약 13년, 제조 회사 혁신 부서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약 3년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 메타버스에서부터 시작해 웹 포털과 커뮤니티, 모바일 앱과 게임, 각종 비즈니스 지원 시스템 등 수많은 소프트웨어 제품을 기획하고 구축하고 운영해 왔다.
서비스 기획자, 프로덕트 매니저, 프로덕트 오너, 프로젝트 매니저, 프로그램 매니저 등등, 내 직업을 명명하는 말은 계속 변했지만,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가 있다면 내가 만들고 운영하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있고 그들의 삶에 혹은 일에 내가 만들고 운영하는 이 서비스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소망이다. 그리하여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무언가’이기를, 내가 매일 회사에서 보낸 그 긴 시간이, 가끔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던 그 시간들이 사용자를, 그들이 사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롭게 했다는 자부심으로 보상받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물론 회사원에게는 ‘돈’이라는 보다 정직하고 직관적인 보상이 있다. 회사원은 모두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 통장에 꽂히는 이 보상은 의식주를 영위할 수 있게 해 주고 물질적인 존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너무나도 귀한 무언가다. 이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회사원’이 아니라 ‘자원봉사자'가 될 뿐이다.
반면에 ‘일’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내 경우엔 기술을 통해 인간을 이롭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것이 IT 업계 서비스 기획자로서 품은 내 일의 의미였지만, 사실 제조업이든 건설업이든 유통업이든 서비스업이 든 간에 모든 업(業)은 인간 사회에 쓸모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 쓸모에 수요와 공급이 생기고 값이 매겨지기에 비즈니스가 되는 것일 뿐.
비록 내가 지금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톱니나 나사가 되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보고서를 쓰거나 엑셀 취합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 보고서나 지표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위한 의사 결정의 재료라면 거기에서 그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하나 개별 태스크만 보면 보이지 않던 것도, 그것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일정하게 향하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각각의 태스크는 제법 할만한 ‘일’이지 않을까.
하지만 회사 생활에서 때로는 방향도 보이지 않고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태스크들이 지속되기도 하기에 우리는 한 번쯤, 아니 틈날 때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 이 일은 어떤 의미인가. 이 일은 세상에 어떤 의미인가.
회사원에게 ‘돈'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이 일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회사 생활의 ‘필요조건’이라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이 일을 계속하고 싶게 만드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닐까.
이왕이면 고단한 회사 생활에서, ‘의미 있는 일’의 파이를 좀 더 키울 수 있는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한다.
<각주>
* 메타버스(Metaverse):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가상현실을 구현한 여러 형태나 콘텐츠를 통칭하는 용어. 1992년 출간된 ‘스노 크래시'라는 소설 속 가상 세계 명칭인 ‘메타버스'에서 유래했다.
**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미국 Linden Lab에서 제작한 아바타 기반의 3D 가상세계로 2003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