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느꼈던 그 생경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은 21살 때였다
대학교 진학을 할 수 없어서 아버지 후배의 소개로 오퍼상에 취직을 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 명동에서 앙그레 김이라는 디자이너를 만난 것보다 유명 연예인을 보는 것보다
더 생경한 경험으로 다가온 것은 그 사람이었다.
겨울이었다.
오퍼상의 일상은 전화를 받고 은행에 가서 잔고를 확인하고 물건들을 닦고 확인하는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기에 지루함마저 들었다. 까탈스러운 성격의 사장님은 작은 키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내게는 후덕한 편이라 같이 밥을 먹기도 하였고 가끔 사모님이 나오면 롯데 백화점에 함께 다녀오라며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백화점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사모님이 사주는 새롭고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었고 혹 운이 좋은 날은 핀이라든지 장갑등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그 고마움에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장님을 위해 생강을 사다가 탕비실에서 까고 귤피와 파뿌리와 계피를 적당히 넣고 끓여서 차를 만들어 드렸는데 차향이 좋다며 김양 덕분에 가래가 덜 나온다고 칭찬해 주었다. 거기다가 바이어라도 오면 그 차를 자랑하며 권했고 반응들이 좋아서 사장님이 많이 뿌듯해하였다.
처음에는 내 용돈을 털어 차를 끓여 대접했지만 하루 이틀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찬물에서 생강강을 까느라 빨갛게 된 손으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끓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이제는 경비로 처리하라며 배려도 해주었다.
같은 층 사무실을 쓰는 다른 업체들의 사장님들도 진향 차향에 이끌려 한잔씩 하러 오기도 하였고 그 일로 인해 사장님은 생각지도 못한 판매를 하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다른 직원들이 오기 전에 청소를 하려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곱슬머리를 옆으로 물결치듯 쓸어 넘긴 웬 남자가 들어오더니 인사를 한 뒤 접대용 의자에 앉았다. 처음엔 거래를 하러 온 사람인 줄 알았기에 어제 남은 차를 주고는 청소를 하려고 빗자루를 들었는데 그 남자가 빗자루를 내 손에서 빼앗듯 가져가더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신데 남의 사무실을 청소하세요?"
어이없어하는 내게
"나, 말단직원, 오늘 입사하니까"
새로운 직원을 뽑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던 나는 차갑게 사무실 잘못 찾아온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정확하게 상호를 대고는 청소를 하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고 황당함에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빗자루 빼앗을 기회만 노렸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할 일이 없냐고 되물었다.
"아뇨!"
나는 일부러 창문과 사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바늘 같은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마구 날아와 사무실은 물론이고 내 몸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손을 호호부는 나를 보았는지 그 남자는 전기난로를 켜서 가까이 놓아주었다.
뻘쭘하고 이상한 감정,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다른 직원들이 왔고 곧이어 사장님도 출근하셨다.
조회가 시작되자 사장님은 그제야 새로운 직원이 왔다며 그 남자를 소개하였다.
처음이니까 다들 잘 부탁한다면서도 사장님은 나에게 이놈한테는 너무 잘해주지 말라며 질투할 거라 하였다.
내가 어벙벙한 얼굴로 사장님 얼굴을 쳐다보자 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안 그래도 별로 친절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빤히 쳐다보는 내 눈길을 느껴서일까, 농담도 못하겠다며 자리에 앉는 그 남자 때문에 되레 내 얼굴이 화끈거렸고 차를 마시면서도 뭔가 놀림을 받았다는 느낌에 기분이 별로였다.
처음 온 날이니 사무실 업무부터 파악하라며 은행에 가려고 나서는 나를 따라가라는 사장님의 지시에 그와 함께 거래처 은행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은행일을 하는 동안 담당 은행원을 소개해주었고 은행마다 넣어야 하는 금액과 잔고를 가르쳐 주고 사무실 예비비등을 가르쳐 주었다.
사무실로 오는 내내 나는 그에게 말 한디 건네지 않았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나는 아침마다 하던 일을 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잠도 없는지, 도대체 몇 시부터 출근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출근하면 이미 청소는 물론이고 책상정리까지 다 되어 있었다. 며칠 하다 말겠지 했는데 한 달이 되어도 석 달이 지나도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청소를 해놓고 기다렸다. 덕분에 나는 아침에 차를 끓이고 사장님 책상만 정리하면 되었기에 출근하는 다른 직원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음악을 틀었고 때론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업무준비를 해 놓았고 사장님은 출근할 맛이 난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이제껏 살면서 칭찬과 고맙다는 알을 별로 들어본 적이 드물었던 나는 그런 칭찬이 즐거웠고 근무하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었고 좀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 대한 고마움이 자라고 있었을까.
거의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에서 물건을 싣고 오는 금고를 인수하러 그가 부산에 출장을 갔고 아침부터 청소에 차를 끓이느라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날따라 거래처 결제일이라 정신이 없어서 점심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김밥하나 겨우 먹고 일을 하느라 힘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직원들도 외근 중이었고 사장님도 바이어를 만난다고 일찍 들어가셨기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일을 처리하느라 평소보다 퇴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서류 정리를 하는데 느닷없이 오롯이 떠오르는 그 남자의 얼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밀려왔다.
'보고 싶어!'
왜 갑자기 그가 그토록 보고 싶은 것인지 멍하니 창문을 통해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왜 그래?"
울음 섞인 목소리에 그가 놀라서 사장님한테 혼났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겨우 대답 헸는데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다.
이상한 내 마음을 말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그는 지금 부산에서 올라가는 길이라며 한 시간가량 남았으니 꼭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시간 후 숨을 헐떡이며 그가 달려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앞 뒤로 둘러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근심스럽게 물어보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밥이나 먹자며 데리고 간 곳은 메트로 호텔 옆의 일식집이었다.
따스한 복국물과 초밥등을 시켜주며 하나씩 건네주는 그.
"뭔지 모르지만 이제는 울지 마!"
심각해진 얼굴로 네가 울고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저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그의 말이 왜 그리 가슴 훈훈하게 다가오는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그와 전에 따로 만나 차 한잔 한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가 왜 보고 싶었는지 또 그의 친절함은 무엇이라 생각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다독임에 가슴 울렁거리고 따스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엄마나 아버지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허허로움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와 인연이라면 좋겠지만 그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미안하였고 고마웠다.
겨우 용기를 내어 그에게 내민 초밥 하나. 그는 아, 하며 입으로 받으려다가 내가 얼결에 손을 내리자 피식 웃더니 젓가락으로 받아먹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러 가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우물쭈물하는 네게 그가 주문해 준 파르페. 스르르 녹이 드는 달콤함과 같이 그가 내게 다가왔다.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이 멋쩍어 멀찍이 떨어져 걷는 내게 다가오더니
"우리 이제 나란히 걸어도 되잖아!? 손을 잡아주면 더 좋고..."
얼굴 빨개진 내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오늘은 여기 까지라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명동의 밤거리는 아름다웠고 그날 후로 우리는 가까워졌다.
봄이 오자 우리는 인천에 있는 자유 공원에 데이트를 갔다.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계단을 오르느라 그와의 데이트에 예쁘게 보이고 싶어 신었던 새 구두 때문에 발뒤꿈치는 오래전에 까져서 쓰라림 때문에 걸음은 어눌해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가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등을 돌려 대었다.
"업혀!"
남의 시선은 안중에 없다는 듯 등을 내주고 업히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그런 배짱이 없었다.
싫다며 계단을 오르는 나를 잡아 세운 그는 내 발 뒤꿈치를 보며 이렇게 되도록 왜 말 한마디 안 했냐며 이 상태로는 자유공원 구경도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고 하였다. 정 창피하면 고개 숙이고 자는 척하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등에 업혔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등에 기대어 듣는 팔팔 튀어 오르는 생선의 그 싱그러움과 강한 심장소리에 숨을 멈췄지만 어느새 나의 심박수는 그와 맞춰지고 있었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 등에 업히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의 등은 남다른 안온함이었고 따스함이었다. 그랬기에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그의 등에 영원히 업힐 수 있는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유공원에 올라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사진을 찍었고 그는 내게 말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 나라를 지켜주었듯이 너를 옆에서 지켜주고 싶다고...
살면서 누구한테 지켜주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가슴 찡하게 파고드는 벅찬 기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주책없이 흘러내렸다.
"그 큰 눈으로 네가 나를 보고 울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처음 볼 때는 사나운 것 같더니 이제 보니 울보였네 라는 말에 피식 웃는 내게 넌 웃는 게 예쁘다고 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세수를 하면서도 로션을 바르다가도 그의 말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하는 모든 것들이 내게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남자와 손을 잡은 것도 입에 귤을 까서 넣어 주고 입을 맞추고 껴안고 업히는 것도...
그는 내게 옷과 신발을 사주었고 꾸며주며 기뻐했지만 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미안하였고 안타까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헤아리듯 그는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었는데...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그가 가을에 졸업여행을 다녀온 두 달 후였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그, 그러면서도 내게는 변함없었다.
그런 어느 날 사장님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사모님이 나왔다.
이제는 언니 같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가 되어 있었던 차였다.
다른 때처럼 쇼핑을 하던 사모님의 근심 어린 한마디.
"에휴.. 우리 도련님 불쌍해서 어떻게 하지?"
왜냐고 묻는 내게 사모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했다.
'졸업여행을 간 도련님한테 아기가 생겼다고... 전에부터 알던 동기생인데 그날 술을 먹고 일이 생긴 것 같다고
그런데 우리 도련님 지금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후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억에 없다.
아기가 생겼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장님 생일잔치를 하고 늦었으니 집에 데려다준다고 나온 그에게 나는 물었다.
"아기... 가..."
하는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그가 내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실수였다고, 내가 이런 말을 너에게 할 줄 몰랐다고... 하지만 사실이라고.
술이 너무 취해서 기억할 수 없지만 자신이 파악한 것은 평소 그를 좋아하던 여자가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고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이 이렇게 벌어졌다고 ᆢ
그러니 제발 딴생각하지 말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염치없지만 정리하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를 사귀면서도 나는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생각이 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내가 과연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사장님의 막냇동생인 그, 경영학과를 나와 새로운 사업을 해 보고 싶어 형 밑에 와서 일을 배우는 중이었고 이리시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부잣집의 막내아들이라는 그였기에 나는 늘 내 부족함이 가슴 아팠고 안타까웠다..
그를 위해 뭐 하나 해준 것도 없는 나였기에 그의 마음을 받으면서도 언젠가는 끝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때론 억지로라도 열심히 돈을 벌면 가난은 상세되고 또 공부를 마치면 얼추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런 나의 발목을 잡아끌어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다름 아닌 헤어진 부모였다.
지금도 이혼은 별로 좋은 어감이 아니지만 그 시절에는 이혼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는 것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었고 가십거리였기에 그에게 말한마디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 부모에게 수도 없이 버림받았기에 뭔가 늘 부족하고 불안하고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았던 나 때문에 그가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그는 우리가 끝날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와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이리로 내려가서 일을 해결하라고 하는 사장님의 말에 가야지 하면서도 내가 불안하여 가지 못하는 그를 찾아온 여자를 보게 된 것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애달픈 눈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슬퍼서 또 가슴이 시렸다.
교육자 집안의 딸이라는 여자.
그 여자에게는 나처럼 찐득한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고 잘 자라서 부유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기에 겨루지 않아도 그냥 밀려나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나였다.
그와 나의 관계를 알 리 없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의 만남에서부터 함께 다녔던 학창 시절의 추억들을 이야기를 했고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말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 헤어지자 말하면서도 나는 그 여자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행히도 다른 업체 사장님으로 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게 되었다.
골프채 수입을 하는 업체의 사장님께 다음 달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는 사장님께 사표를 내었다.
일 잘하던 여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자 사장님은 배신감에 몇 날을 잠을 설쳤다고 사모님을 통해 전해 들었고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혹 월급에 관한 것이라면 원하는 만큼 더 올려주겠다는 말에도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고 다시 돌아오라는 사모님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사무실로 이직하였다.
눈앞에서 멀어지면 잊히겠지... 그러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것이었는지 그의 발밑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입술에서 나오는 허무의 그 연기를 하늘로 날리다가 나를 보자 급히 담뱃불을 끄고 달려오는 그를 보는 것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무려 일 년이나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르다가 하나 둘 직원들이 알게 되었고 그가 오는지 안 오는지 내기를 하기도 하였고
"왔다" 며 우리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매몰찬 나쁜 여자였고 어떤 여직원은 네가 잘난 게 뭔데 그러냐며 매일 오는 그를 동정했다.
저 정도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냐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하게 전 사장님(그의 형)한테 전화가 왔다.
한번 사무실에 와 달라고...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만둘 때 제대로 인사도 못했기에 퇴근하고 들리겠다고 하였다.
막상 사무실에 들어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서성대길 한참만에 겨우 들어간 사무실에는 다른 직원들은 다 가고 사장님과 그가 있었다.
"아, 김양아"
반가워하는 사장님의 얼굴에 가슴이 꽉 막혀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내게 자리를 권한 사장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퀭한 그의 모습이 아프게 눈에 박혔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미안하다!"
내가 느닷없이 그만둬서 한동안 배신감에 힘들었다고 그래서 욕을 했다고 고백하는 사장님.
그러나 얼마 전에야 이 모든 일이 내 못난 동생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자꾸만 욕하고 배신감에 힘들어하는 형에게 자신 때문에 김양이 그만둔 것이라며 우리 이야기를 고백한 그는 형에게 혼이 났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김양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며 내 동생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조금이라도 서로 좋아한다고 눈치라도 주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지금은 어떻게 되돌릴 수 없는 입장이라 억장이 무너진다는 사장님은 어른으로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며 퇴직금도 챙겨주지 못했다고 봉투 하나를 주었다.
받을 수가 없어서 도로 내민 내 손을 잡으며 사장님은 진심을 다해 사과하였다.
그 손길에 그동안 가슴에 담아만 놓았던 아픔이 앞 다퉈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느라 들썩이는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던 사장님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감사하다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나와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숨죽여 그간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한참 만에야 겨우 진정하고 나왔는데 그가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 끄는 그에게 이끌려 간 호텔.
객실에 들어간 그는 이성을 잃은 듯하였다.
격하게 끌어안고 거친 입맞춤을 하던 그는 떨리는 손길로 어느새 나의 가슴팍을 헤치고 있었다.
"왜 이래요?"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밀쳐내었는데 그가 폭발하듯 말했다.
"몇 번을 생각을 했어. 내가... 너를 먼저 안았다면 이렇게 네가 나를 쉽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전에 네가 내가 물었지? 너보다 더 사랑했으니까 잔 것 아니냐고... 사랑하는 게 자는 것 라면.. 자자 우리!".
다시 달려든 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 떨리는 불같은 그의 손길에 내 옷이 하나 둘 벗겨졌다.
눈물이 흘렀다.
그의 말대로 해서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내 본심이었기에...
밀고 당기는 거친 몸부림 속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따스한 숨결과 그의 맨살의 아찔한 감촉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그냥 이대로 안기고 싶다는 될 대로 되라는 감정과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해요! 제발... 나는 이대로 살아 낼 수 있지만 아이는.. 당신 아이는 그럴 수 없어요.."
가슴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눈물범벅인 내 얼굴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객실을 뛰쳐나갔다.
그가 나간 후 다리가 풀린 나는 주저앉아 오래도록 울며 후회하였다.
다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싶었기에...
시간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사무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혹여 그가 볼까 봐 일부러 집 근처에 사는 새로운 남자직원과 나란히 퇴근을 하였다. 그 남자직원과 나누는 대화는 어색하고 멋쩍은 것이었지만 멀리서 그가 보게 된다면 나의 변화로 인식하고 돌아서주길 바라면서...
한 일 년이 지났을까?
명동의 로열호텔 앞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낯 모를 여인을 안고 가며 술에 취해 있던 그가 나를 보았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여자를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행복.. 하니?!"
멍한 눈으로 낯선 그의 모습을 보며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행복.. 하냐고?!"
멀어지는 내게 그는 악을 쓰듯 물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또박또박 걸으며 듣지 못할 그에게 대답했었다.
"아뇨!"
모퉁이를 돌아서며 언뜻 돌아본 그의 모습이 눈물 어린 내 눈 속에서 흐려졌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