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미안해하지 말아요.
얼마 전 에이드리언 리치의 <모성 신화에 대한 반성_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작가는 아들 셋을 키운 엄마이자, 시인이다.
이 책은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강요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신화적, 역사적인 기록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어머니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묻고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내 가슴에 훅 들어와 꽂힌 문장이 있었다.
어머니의 아이들을 향한 분노와 애정, 그리고 죄의식에 관한 부분이었다.
1. 분노와 애정
(중략)
일지에서, 1960년 11월
아이들 때문에 극히 절묘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애증의 고통이다. 격렬한 원망과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섰다가는 곧 살인적일 정도로 빠르게 찬란한 희열과 부드러움으로 바뀐다. 때때로 나 자신이 보기에 나는 순전히 감정 때문에 이 작고 아무 죄 없는 것들을 이기심과 편협함으로 똘똘 뭉친 괴물처럼 여긴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내 신경을 지치게 만들고,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들, 특히 그들이 단순함과 인내심을 요구하면 내가 그것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절망하고 또 내 운명에 절망했다.
p19
매일, 매일 저녁, 매 시간,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라는 어머니로서의 죄의식의 완전한 무게와 부담을 곧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성의 제도하에서, 모든 어머니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이 아이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죄의식을 느낀다.
P251
이 부분을 읽고 내가 아이를 돌보면서 느꼈던 죄의식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엄마들이 겪었던 감정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나는 지금 쓰는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가 파헤친 가부장제의 모순 속 모성제도에 관한 관점보다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엄마의 죄의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아이를 낳기 전엔 내가 한 선택과 행동에 딱히 후회하거나 미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잘못을 하고,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었지만 ‘아, 내가 잘못했구나,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잘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울 때는 매일 후회하고, 매일 미련을 남기고, 매일 반성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기가 잠들면 나는 아이 발치에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엎드려서 아이의 조그맣고 통통한 발을 양손에 움켜쥔 채,
“엄마가 미안해, 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럴게.”
하고 눈물의 사죄를 하는 것이 매일 밤 의식과도 같았다.
엄마는 왜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까?
위 책의 서문에서 다루 듯, 엄마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양립하는 감정이 바로 분노와 애정이다.
어떤 일을 하든,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어도 오래 지속하다 보면 그 일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다시 떠올리고, 그 일의 보람된 점을 되새기면 힘들었던 부분이 상당 부분 상쇄되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동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육아는 내가 아이를 진실로 절절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우울감과 좌절감, 고립감 그리고 외로움 등의 어두운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거대한 분노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아이가 예쁜 건 예쁜 거고,
죽도록 힘든 건 힘든 거고.
아이가 영유아 시절 내가 왜 분노했는지,
어떤 때 분노를 강하게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고,
크게 세 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면
이성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기가 힘들어진다.
내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든데,
온종일 전 존재를 나에게 의지하면서 울고, 떼쓰고, 화내고, 위험한 짓을 서슴지 않는 아기를 엄마 혼자서 돌보는 건 애초에 초인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특히 첫아기를 키우는 경우, 혹은 연령 차가 적게 나는 아이들을 동시에 돌보는 경우엔 더 하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서의 분노는 나 자신을 지키고 방어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분노 자체가 나쁜 감정인 건 결코 아니다.
남편은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 출근하고, 밤에 잠들면 퇴근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휴무였다.
그 말은 주 6일 동안 하루 종일 나 혼자 아이를 돌봐야 했다는 뜻이다.
하루 종일 아이와 전쟁을 치르면서 집안일을 하고 어두운 거실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순간 허탈해졌다.
사람이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면, 나 자신을 잃는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내면에 울분이 쌓인다.
그리고 언젠간 폭발한다.
아이를 향해 폭발하든, 남편을 향해 폭발하든.
혹은 나 자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내 경우엔 세 가지 다였다.
아이를 낳기 훨씬 전부터 양육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일찍부터 끌어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나는 ~한 엄마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런 엄마가 좋은 엄마니까!’
라는 강한 신념을 세워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24개월 동안 완모 할 거야.”
“나는 아이한테 절대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을 거야.”
“나는 늘 내가 직접 정성스럽게 요리해서 먹일 거야.”
“나는 만 36개월까지는 절대 기관에 안 보내고 가정보육 할 거야.”
등등
[브런치북 <죽음을 명상하는 엄마입니다> “거, 흑백논리로 살지 말아요”편 참고
이 중에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육아와 관련해선 더욱더.
‘좋은 엄마’라는 틀을 세워놓고, 그걸 하나하나 어길 때마다 나 자신을 형편없는 엄마라고 여겼고, 엄마로서의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주 의기소침해지거나 화를 잘 낸다.
이 세 가지가 내가 아이를 양육할 때 자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엔 이렇게 분노하는 나날들을 어떻게 헤쳐 나오면 좋을지 내 경험을 토대로 하여 다시 세 가지로 정리해 봤다.
가끔씩 남편이나 (남편은 당시 지독하게 바쁜 시절이었음에도 집에 있는 동안엔 본인이 할 수 있는 에너지의 200%를 다하여 육아와 살림에 참여했었다. 그러므로 육아는 ‘당연히’ 부부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 맞지만 이 점을 감안하여 ‘도움’을 요청했다는 표현을 쓰겠다) 친정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서 두세 시간 정도 아이를 맡기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거리다 오곤 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좋아한 나 자신이 나쁜 엄마 같았다.
‘내가 아이와 떨어지고 싶어 하다니! 엄마 맞아?‘
‘내가 엄마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왜 도망치려 하지? 난 엄마도 아니야.’
아이는 원래 엄마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다.
아이는 어른 여러 명이 함께 돌봐야 한다.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또 다른 생명을 낳아, 이 세상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늠름한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은 인생의 대업이다. 그런 일을 90% 이상 엄마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이다.
본의 아니게 목숨 걸었던 처절한 출산 이야기 <죽음을 명상합니다>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한 시간은 너무 짧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서 반드시 그 시간을 누리고 오라. 좋아하는 일, 기쁘게 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을 찾는데 시간을 할애하라.(아이가 내 품에서 슬슬 멀어질 즈음 그것을 낚아채서 제대로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온다)
그러면 육체적 에너지뿐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 아이를 향한 사랑 에너지, 양육 에너지가 가득 차올라서 더 넓은 가슴으로 아이를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만 다섯 살 정도가 될 때까진 하루하루 너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에 내 삶을 거시적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고단한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의외로 시간은 빨리 흐르고, 내 아이의 영유아 시절은 곧 끝이 난다.
훗날 떠올려보면 가슴 저릿한 추억들에 눈물이 나고, 웃음도 나는 시간이 올 것이다. 내가 지금 그렇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라.
육아 생활 중 개인 시간을 누리기 위해 외출했을 때 마셜 B로젠버그의 <NVC 비폭력 대화>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지옥이란 바로 아이들을 키우며 세상에 좋은 부모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
(중략)
우리가 완벽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들 자신을 비난하고 또 공격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없다. (중략)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정서적 지지를 우리가 받지 못하고 있다.
p296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오소희 작가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접했던 글을 공유하겠다.
최고의 부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부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네이버블로그_태평양의 끝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완벽한 부모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누구나 내 아이에게 실수할 수 있고, 또 그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자. 진심을 다해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자. 사실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는 마음의 그릇보다 아이가 부모를 용서하는 그것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아이들은 우리가 최고의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엄마이고 아빠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엄마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엄마는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최선을 다하는 엄마, 혹은 아빠가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어제보다 나은 부모가 되고 싶다. 올바른 양육을 위한 좋은 방법을 찾고, 더 온전한 사랑을 주고 싶다.
육아를 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이고, 나 애쓰는구나.
더 나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더 나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 노력하는구나.
하며 스스로를 좀 다독여주자. 아이들도 그런 부모를 보고, 자기 자신을 잘 돌볼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도움되는 대목에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무시하세요.
-앨리스 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