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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May 20. 2024

‘유혹의 시대’로부터 나와 내 아이 지키기

Feat. 자본주의

뉴스나 신문에서 종종 접하는 기사가 있다.


‘청소년 자녀에게 70만 원에서 120만 원까지 하는 모 브랜드 패딩 점퍼를 사주기 위해 부모의 등골이 휜다.’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고가의 애니메이션 굿즈 때문에 가계가 휘청한다.’


한 TV프로그램에서는 집 안이 온통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아이의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부모에게 물어보니, 부모 자신이 어린 시절에 장난감을 너무 갖고 싶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이 사주시질 못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만큼은 다 해주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이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들은 다 있는데 내 아이만 없으면 자존감 낮아질까 봐요.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진다. 부모 안에 ‘갖고 싶은 물건, 남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나도 가지지 못하면 자존감이 낮아진다.’라는 신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자존감은 결코 돈으로 채우는 게 아니다.


내 아이만큼은 풍족하게,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주고 싶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게 해주고 싶어!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아이가 원하는 무언가를 갖게(하게) 해줬을 때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 부모 마음은 뿌듯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한다.


‘이게 정말 옳은 양육 태도일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곧 아이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풍요로운 삶을 사는데 자기 절제력, 만족 지연 능력이 꼭 필요한 이유와, 많이 소유하지 않고도 아이와 함께 풍요로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부모들도(필자도 포함) 이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어제 TV에서 봤던 길쭉한 귀걸이를 갖고 싶,)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절제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절제’라는 단어만 들어도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고, 원하는 일을 못하도록 제지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편해진다. 굳이 ‘자기 절제’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사실 생각보다 단순하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끝이 없기에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나한테 저것만 있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


NO.

며칠 지나면 더 좋은 게 보이고, 또 갖고 싶을 것이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행복과 자존감을 얻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감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건 그저 쾌락적인 자극일 뿐이다. 이건 중독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들어 약물과 관련해 각종 매체에서 ‘도파민 중독’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소비 중독 또한 도파민 중독과 연관이 있다. 중요한 건, 어차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세상 모든 물건들을 다 가질 수 없는데 그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건 너무나 무용한 일이고, 결국 공허함과 소외감이 커지면서 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건, 인간은 과도한 물질적 만족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고의 전환과 연습이 필요하다. 한 명의 양육자로써, 절제력을 키우며 올바른 선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일상 속 소소한 실천들을 공유해 보겠다.




첫 번째, 감사하는 습관 들이기


“나는 감사할 일이 없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알고 있나?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이다.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겸손해지고,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것과 관련한 내 이야기는 브런치북 <죽음을 명상하는 엄마입니다.>에서 다루고 있다 - 바로가기​)


출산 직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가장 강하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감사함이었다. 일단, 숨 쉬고 있어서 감사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내 아이의 엄마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서 정말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손잡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다.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봄을 맞이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침 해가 뜨고, 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오늘 아침에 먹을 음식이 있음에 감사하다. 아이의 바이올린 레슨 보강 날짜가 수월하게 잡혀서 감사하다. 아이나 남편의 행동이 간혹 마음에 안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매일, 새삼스럽게 감사하다.


우리는 언제, 어떤 식으로 생을 마감할지 알지 못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삶의 여정 어느 모퉁이에서 죽음과 마주칠지 확신할 수 없다. 너무 비관적으로 느껴지는가? 그러나 사실이다. 우리는 재고 소진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정수를 사유하게 한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자기 전에 아이와 누워서 오늘 하루 동안 감사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뿅뿅이가 무사히 건강하게 학교에 잘 다녀와줘서 고마워.”
“엄마가 오래전에 선물했던 나무 인형으로 아직까지 재미있게 놀아줘서 정말 고마워.”
“감기 기운이 심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봄꽃이 향기로운데 뿅뿅이랑 같이 맡을 수 있어서 감사했어.”


“오늘 수학 숙제가 없어서 감사해.”
“땡땡이랑 놀이터에서 오래 놀아서 좋았어.”
“엄마가 도마뱀 키우게 해 줘서 고마워.” (하아…ㅠㅠ)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게 된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내면이 충만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두 번째, 직접 소통하고 교감하며 나누는 삶을 살기


바야흐로 ‘대 SNS시대’가 도래했다. 인터넷 매체가 인간사회에 편리함을 제공한 건 맞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이 큰 것도 사실이다.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개인을 고립시킨다.

덴마크의 철학자 스벤 브링크만은 <절제의 기술>이라는 책 54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슈워츠는 행복의 핵심이 개인에게 있지 않고, 타인과의 친밀함과 사회적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야말로 실제로 우리를 굳게 결속시켜 준다는 것이다.

내가 <철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다룬 것처럼
행복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타인들에게 올바르게 매여 있는 상태다.


올바르게 매여 있으려면, 인터넷 연결망만으로는 안된다. 직접 만나서 눈을 마주치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 무언가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마음이든, 반찬이든. 정말 자신의 삶을 알차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휴대폰만 들여다보면서 댓글창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신세 한탄만 하고 있지 않다.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인간관계를 넓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를 만나더라도 피상적인 관계를 맺지 말고,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며, 일상에서 만나는 물음표에 대해 함께 고민하면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무한의 인스타 릴스에서 헤어 나와 현실 속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라.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초등 저학년 아이들 같은 경우엔 확장된 인간관계 속에서 규칙과 규범을 배우고, 그 테두리 안에서 관계 맺음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 밖에서 놀아야 한다. 놀다가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고, 그러면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감동적인 순간도 경험해 봐야 한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역지사지의 가르침을 피부로 배워야 한다. 종일 학원을 오가며,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간 그런 경험들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모조리 놓치게 된다. 놀이터에서 올바른 관계 맺음과 소통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말라.




세 번째,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기


예전에 마트에 갔는데 한 엄마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면서,

유치원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

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자랑’이 무엇인가? ‘자랑’은 일종의 ‘과시’이다. 직장에서 자신이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과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물론 이미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친한 사람의 자랑은 귀엽게 여기며 함께 기뻐해줄 수도 있고, 하나의 좋은 정보로써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경우엔 다르다. 패션계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장난감 산업은 끊임없이 아이들을 유혹하고, 특정 장난감의 소유 여부는 아이들 사이에서 묘한 권력 구도를 형성시키기도 한다. 이런 권력관계를 자주 경험할수록, 그리고 아이들 간에 그런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수록 물질의 유혹에 더욱더 취약해질 것이다. 왜 부모가 나서서 자극하는가? ‘자랑’은 ‘너한테 없는 걸 나는 가지고 있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부러움과 질투심을 유발한다. 또한 누군가는 내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값비싼 걸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걸 가지고 있는 아이가 내 아이에게 자랑했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해서 더 화려하고 비싼 장난감을 사줘야 할까? 그 끝은 어디인가?


물론 마트에서 봤던 엄마가 다른 친구의 부러움과 질투심을 유발하라는 목적으로 그렇게 말했던 건 아닐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아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런치북 <코끼리 다락방>의 첫 번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완벽한 인간이란 없고, 완벽한 부모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육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올바른 방향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방향을 어른들이 함께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찾아봐야 한다. 이것이 너무도 빠르게 급변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엄마 자신과, 내 아이, 우리 아이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다른 실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소신 있는 엄마가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 아이를 양육할 수 있다. 함께 공부하고, 실천해 보자.



도움 되는 대목에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무시하세요.
-앨리스 워커-

당신만의 육아 방식을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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