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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May 30. 2024

혜화동 잔혹사, 그 야만의 기억

"그렇게 살아선 안 돼."

주변에선 이전에 단원으로 있었던 극단에 들어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많이 했다. 완전히 새로운 극단에 들어가 적응하는 건 어려울 거라는 의견이었다. 단칼에 거부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연극을 시작한 그 극단에선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곳엔 권위적이고, 위계적이고, 폭압, 폭력적인, 연출이자 대표가 있었다. 그가 등장하면 연습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치 검은색 안개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의 왕이었다. 폭군이었다.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다. 폭언, 욕설을 퍼부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어린 여성 배우의 정강이를 발로 차거나, 팔꿈치로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인간적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는 언행은 일상적이었다. 술자리에선 반드시 여성 단원이 옆에 앉아야 했다. 그리고 그 단원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실실 쪼개면서.


극단에 입단한 첫 해에 총무 역할을 맡았다. 어느 날 갑자기 주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전에 도맡아 했던 선배와 함께였다. 한 번은 집에 있을 때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데다 발음이 부정확해서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욕만큼은 정확한 딕션으로 구사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기도 했고, 돈과 관련한 일이기에 더욱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맞게 알아들었는지 재차 질문하자 슬슬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을 그만하고 원래 이 일을 담당했던 선배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선배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다시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이 좆만 한 년아!


그는 자기와 통화한 내용을 선배에게 다시 질문한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별의별 폭언이 고래고래 쏟아지는 동안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댔다. 온몸이 굳었다. 목구멍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알고 보니 그가 나에게 시켰던 일은 돈세탁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으니 얼마나 식겁했을까?


헝가리로 해외 공연을 갔을 때의 일이다. 숙소부터 공연장까지의 거리가 꽤 있었는데 걸어 다녀야 했고, 타지에서 길을 잃으면 곤란하므로 모두 함께 다녔다. 대표 옆에는 늘 보디가드처럼 남성 배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한 두 명 정도의 여성 단원이 있었다. 언제든 그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잽싸게 시중 들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행 중엔 엄마 또래의 남성 배우도 있었다. 그는 대표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고, 그 해에 처음 데뷔한 나에게 힘을 북돋워 주곤 했다. 숙소와 공연장을 오고 갈 때 나는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중 터키 공항을 경유하는 과정에 그가 모두를 공항 건물 밖으로 집합시켰다. 그를 중심으로 우린 동그랗게 서서 처분을 기다리듯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공항의 외국인들이 우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대표는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곧, 그가 삿대질로 정확히 나를 가리키더니 외쳤다.


너! 아주 용감하더군!
나도 ‘모심’을 받을 나이가 됐어!


헝가리에서 내가 자신을 보좌(?) 하지 않고, 다른 선배와 함께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밖에 다른 단원들에게도 헝가리에서 본인의 심경을 건드린 부분들에 대해 한껏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은 후에야 우린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납득이 가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모심’을 받을 나이가 됐다고 외치던 그의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극단썰을 풀어놓는 김에 한 가지 더 에피소드를 풀어놓자면, 이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로 일명 ‘계란 프라이 사건’이다. 당시엔 연습실 내에서 밥과 반찬, 국을 직접 만들어 식사를 했다. 선배 한 명, 후배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아침 일찍 만나 장을 보고, 연습실에 들어와 밥을 안치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였다. 내가 지금 할 줄 아는 요리의 8할은 그때 배운 것이다. 낮연습이 끝나고 단원들이 함께 상을 차리고 있었다. 한 여성 단원은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다른 단원이 “내 건 노른자 터뜨리지 말아 줘.”라고 말했다. 하지만 계란 프라이를 부치던 친구는 장난치듯 키득거리며 뒤집개로 노른자를 터뜨렸다. 그때 대표가 그 장면을 보고 무슨 말인가 툭 던졌는데, 우리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 표정이나 말투가 혼잣말에 가까워 보이는, 대수롭지 않은 말 같아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계란 프라이를 부치던 단원이 노른자를 하나 더 터뜨렸다. 대표가 다시 말했다. 역시 우물거리는 듯한 말투에 우린 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아뿔싸, 시간차를 두고 나는 알아듣고야 말았다. 그건, “내 건 터뜨리지 마라.”였다! 다급히 그 단원에게 전하려는 찰나, 다시 한번 노른자를 터뜨려버렸다!


야! 이 개 같은 년아!
노른자 터뜨리지 말랬잖아!
너나 처먹어!


연습실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계란 프라이를 부치던 여성 단원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죄했다.


몇 번이고 극단을 나가려 했다. 공연 일정이 휘몰아칠 땐 여유가 없었지만, 잠깐의 공백이 생기면 이 집단에 계속 있는 것이 맞나, 회의감이 들어 극단 일을 손에서 놓고 알바를 하며 지냈다. 그럴 때면 대표는 나의 그런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채곤 불러내서 사과를 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바뀌겠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었다.


애통하게도 그는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많은 배우들이 그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함께 작업하고 싶어 했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결혼 전 마지막 작품을 공연할 때 술자리에서 한 선배에게 그 근래에 발생한 연출의 폭행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선배에게 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때려도 되나요?”


선배가 답했다


“응.”


재차 물었다.


“때려도 된다고요?”

“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난 그 인간의 ‘생각’에 경악했다. 만 5년 간의 극단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였다. 연출과 관련된 모든 해로운 인연들을 끊고 싶었다.

만약, 앞으로 영원히 연극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야망 있는 자였다. 자신이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에겐 폭군이었고, 연극계의 권력 있고 명망 있는 사람들 앞에선 깍듯하고 예의 바른 후배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결국 그는 현재 국내 연극계의 꽤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가끔 기사에서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 속 전두광을 보면서 그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나보고 거길 다시 가라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힘 있잖아. 네가 다시 연극계에 알려지고,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만 참으면 되지. 그 후에 네가 하고 싶은 사람들이랑 해도 되잖아.”


내가 말했다.


어떻게 되찾은 생명인데,
얼마나 소중한 삶인데,
남은 생을 그런 인간과 함께하면서 낭비할 순 없어.
설령 그 사람이랑 연극 안 하면 이전처럼 다시 아플 거라고 해도, 안 해.
평생 아파야 한다고 해도 안 해.
그렇게 살기 싫어.
그렇게 살아선 안 돼.


그리고 또 한 가지, 10여 년 전과 달리, 내게는 그땐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내 아이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자라서 엄마의 사회생활에 관해 질문했을 때 떳떳하게 답하고 싶었다. 옳은 길을 알려주고 싶었다. 반드시 가르쳐줘야 했다.

네 영혼을 파괴하는 자를 가까이 해선 안된다고.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들어갈 극단은 어떤 극단이어야 할까?

세상을,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 사람들과 작업해야 할까?

나는 어떤 배우, 어떤 공연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인스타그램으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라고 하기엔 싱거운 세 글자였다.


승미다!


십 년 전 내가 배우로 출연했던 공연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언니였다. 당시 연출은 위 극단의 대표였다. 그 언니는 내가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자신의 극단을 꾸렸고, 아이를 낳았던 시점부터 연출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전구가 켜졌다.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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