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복이었다. 또 얼마나 많은 닭들이 삼계탕, 초계탕, 닭한마리, 닭볶음탕으로 희생되었을까.
이렇게 복날은 누군가에게 원기 회복하는 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날이다.
뉴스에서 '어르신들에게 사랑의 삼계탕,' 어느 기업의 '말복 프로모션,' '말복 기념 삼계탕 할인 행사' 등의 문구는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나도 몇달 전까지만해도 기력 회복하려고 아플 때 닭죽 먹고 회식 자리에서 목살 먹으러 갔다.
그러다 어느날 떡볶이에 돼지 순대와 내장을 '복스럽게' 먹는 나보고 짐승같다는 누군가의 말이 뇌리에 박혔다.
그 이후 또 몇가지 계기로 식탁 위에 올라온 고기 반찬은 음식이라기보다는 생명체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복인 오늘 80여개 동물보호단체가 동물권을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삼겹살 문화가 아주 깊숙히 들어온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가치관을 갖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인간도 아닌 동물을 생각한다는 게 유난스러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강요'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난 솔직히 잘 모르겠다.
비건, 채식, 동물권, 환경, 건강 등에 대해 공부하면 할 수록 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맞다. 그리고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직접 실천해보니 정말 확실히 건강도 좋아졌다는 점도 신기하다.
그러나, 난 언젠가 고기를 다시 먹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때는 실수로 먹거나 어쩔 수 없이 너무 배고파서 먹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주의자들을 폄하하거나 내 가치관이 더 고상하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비겁해보일 수 있지만, 난 어떤 것이든 극단적이거나 내 색을 너무 돋보이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면 논쟁이 불가피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동물, 환경, 그리고 건강을 위해 타인과 적을 두고 싶지 않고 그저 실천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을 사람은 받고 안받을 사람은 안받을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비건이 나의 모든 생활을 잠식하는 강령이 되도록 살 생각은 없다. 원칙과 도그마는 다르다. 원칙은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준이고, 도그마는 개별 상황에 대한 검토와 수정을 불허하는 아집이다. 적절한 선은 뭘까? 정답은 없지만 내 생각엔 최소항 90퍼센트 이상은 실천하고 있어야 비건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고, 나머지 10퍼센트 이하도 애매하거나 불가피한 것들이어야지, 아무리 1년에 한 번이라도 의식적으로 육류를 사 먹으면서 비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는 최선을 다하는 것. 나보다 철저하게 실전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나의 융통성을 미화하지 않되, 타협을 할 때는 억지로 합리화하거나 찜찜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이다. (p.52)"
「아무튼 비건」의 작가 김한민의 말이다. 90퍼센트 이상 실천을 비건이라고 정의했으나, 난 그것보다 가장 첫번째 문장이 끌렸다. 비건 혹은 현재 내가 실천 중인 페스코 베지테리안의 모습을 너무 강박관념처럼 지킬 생각은 없다. 동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선 안에서 나의 원칙을 고수하고 싶다.
살기 위해 밥을 먹는것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먹는 행위는 대단히 문화적이고 감각적이다. 그래서 어떤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서도 그 문화와 감각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면 굳이 고기를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음식의 실제 맛은 양념에서 온다. 이 양념들은 식물에서 오고, 동물성이 있더라도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 고기의 '근육조직 맛'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소수이다.(p.85)"
"맛은 대단히 종합적인 감각이다. 무엇을 먹느냐만큼이나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하다. 그런면에서 맛은 공감강이다.(p.85)"
얼마전, 같이 파스타 먹던 육식주의자 친구가 미소지으면서 "밀아 미안해~"라면서 스파게티를 입어 넣었다. "밀, 쌀도 생명인데 미안하지 않냐"라는 것이다. 물론 식물도 생명이다. 하지만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통점이 있어 뇌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처럼 얼굴과 표정이 있어 그 고통이 드러난다.
"우리가 고학적으로 고통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신체의 통점과 중추신경계를 통해 전해진 자극이 뇌에서 종합되는 아프고 불쾌하고 피하고 싶은 감각이다. 같은 생명이라도 뇌와 중추신경계, 통점이 없는 식물이 이런 종류의 고통을 지각하고 분석해 처리한다고 생각할 해부학적 근거는 없다(p.145)"
어디선가 '비건=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이 붙여지면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인식이 부정적이게 되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비건이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하지는 않지만, 채식의 길을 걷고자 하는 나는 단순 여성만의 인권이 아니라 소수자들의 인권을 중요시 한다. 소수자 혹은 약자라고 하면 아동, 노인, 소수민족, 그리고 여성을 말한다. 그들은 구조적으로 수백 년 간 억압을 받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어느 한 부류의 인권만 주장하는 것은 조금 인지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아동 인권을 주장하면서 독거 노인의 삶을 외면한다거나,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방해하는 유리 천장을 깨야한다고 외치면서 밤마다 치킨을 뜯어먹는건 조금 앞뒤가 안맞을 수 있다.
"성차별, 인종차별, 종차별 모두 피지배 대상은 달라도 작동시키는 원리가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 그래서 최초의 인종차별 철폐주의자 중 많은 이들이 동물보호주의자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킴벌리 크센쇼 같은 학자는 일찍이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용어를 도입해 억압장치에 맞서는 해방정치를 위해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통점들을 다각도로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이 이론에 비거니즘을 접목시키는 흑인-여성-비건-페미니스트 연구자도 있다. 이미 고전이 된 책 「육식의 성정치」에서 저자 캐럴 아담스는 채식주의와 사회운동의 연관성을 깨닫지 못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며, 여성과 동물에게 가하는 학대 그리고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유사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녀에게 '페미니즘이 이론이라면 채식주의는 실천'이다. 단, 이 모든 담론이 남성 비건이 적은 현상을 합리화해줘는 안 된다.(p.144)"
이 책은 정말 흥미롭고 내 가치관을 공고히 해주는 책이었다. 단, 여기에 나오는 다양한 수치의 근거가 별로 없다. 출처가 있어야 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몇가지 극단적 사례로 일반화 시킨 것만 같은 의구심이 드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채식에 관심이 없더라고 이 책은 한번쯤 누구나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구는 인간만 사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