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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Jul 05. 2022

파혼 후에 오는 것들

얄팍한 사랑 따위


서른넷 여름, 피혼(避婚)했다.


내가... 파혼이라니, 라며 눈물을 그렁거리 나의 무심하고 다정한 친구 L이 단호하게 말했다.


"파혼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해.

청첩장 정도는 봐야 파혼이지."


그건 그렇지. 현실적인 얘기에 금방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말랐다. 나는 본디 그리 감성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래, 파혼(破婚) 말고 피혼(避婚) 정도로 하자. 내가 결혼을 피한 것인지, 결혼이 나를 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 전지, 나는 결혼은 선택이며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결혼이란, '혼자보다 둘이 낫다는 마음에서 시작해 족쇄 같은 책임감으로 끊임없는 갈등을 짊어지고 가는 여정'이라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족쇄를 차고 짐을 지어도 그 이상의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기혼자의 삶을 살아다. 하지만  하나 건사하며 적당히 행복하게 살고픈 나 같은 이에게는 크게 매력 있지 않은 제도로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 결혼은 계약, 자녀는 파기할 수 없는 계약서, 그뿐이었다.


는 외동인데 혼자 부모 장례를 어찌 치르려고 그러니, 라며 한숨을 쉬 엄마에게도 "장례식은 3일이고 내 인생은 그보다 훨씬 긴데, 3일을 위해 인생을 걸 수는 없어. 엄마, 그리고 요새는 상조회사 잘 되어 있어. 걱정하지 마."  라던, 우리 엄마의 하나뿐인 '못돼 처먹은 년'이 바로 나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몇 번의 이별을 지나왔다. 랬던 나를 결혼하고 싶 만들으니,  나의 인생에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음 부정할 수 없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던 그날까지도, 나는 그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평생 동안 서로가 서로의 위안이 되는 사이가 될 것이라 당연스레 믿었기 때문에, 다른 점이 있더라도 함께 좁혀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3억에 달하는 빚도 기꺼이 함께 지고 싶었고, 결혼 후 3년 동안 주말 부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를 평생 동안 나의 반려로 둘 수 있다면 나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가 꿈꾸던 '좋은 아빠'를 이뤄 줄 수 있다면, 남편 없이 홀로 출산과 육아를 하는 것도 감내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에게 나의 인생을 던질 결심을 했었다.


교제하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맞을 수 있을까 서로 신기해했었다. 이런 것이 천생연분이라는 것일까, 감탄도 했었다. 그럼도 불구하고, 결혼을 준비하다 보니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각자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 이 정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이 대화를 많이 하고 서로 존중하며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도 결혼 생활의 예행연습이 될 거라 긍정다. 그러나 문제가 발견되자 그는 고작 3일 만에 나를 잘라내 버렸다. 차라리 그가 불만이 있다나에게 묻고 따져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서로의 차이를 맞추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의 결심은 그의 냉정함에 얼어붙어 산산이 깨어졌다. 과녁을 잃은 나의 결심은 비수가 되어 나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파혼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청첩장 돌리고도 파혼하고, 결혼식 당일에도 파혼고, 신혼여행 다녀와서도 파혼한다. 파혼 후 법적 소송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다들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다고 한다. 의 일이 아니었을 때는 나도 그렇게 뻔한 위로를 했었던 것 같다. 파혼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보기엔 내가 '운이 좋다'라고 할 만도 하다. 내 경우에는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 드렸던 꽃과 홍삼, 웨딩 박람회 사은품으로 받은 실리콘 도마 3종 세트만 정리하면 되기 때문에, 언젠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오히려 '미리 잘 피한 결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습해야 할 현실적 항목 수가 적다고 내가 받은 상처가 적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수많고 복잡한 감정들은 '이 정도면 운이 좋다'며 넘기기엔 너무 생생하게 살아 날뛰어서 아프고 겁이 난다.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두렵다. 그래서 이별 후에 내게 덮쳐온 수많은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느꼈던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는 충격, 마음을 배신당했다는 분노, 남보다도 못하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 앞에서 느끼는 모멸감,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런 사람인 줄 미처 몰랐다는 자괴감,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내 이해받지 못했다는 슬픔, 이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던 자기 확신이 이렇게나 알량한 것이었다는 허탈함, 이렇게 얄팍한 것이 사랑이라면 다시는 사랑을 믿을 수 없을 거란 자기 연민, 내가 또 이런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 이제라도 붙잡으면 마음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미련... 바로 알아차려지는 감정들은 거칠고, 늦게 발견되는 감정들은 추하다. 하나씩 꺼내어 확인할수록 다독여야 할 감정들이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고통만큼이나 이 이별 후의 내 나이가 걱정되는 현실. 여자 나이 서른넷, 결혼 시장에서 상품 가치가 끝나가는 나이. 결혼을 결심해보지 않았던 과거의 나였다면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의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꿈꾸어 본 지금의 나에게는, 강을 건너려 가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진 것 같은 황망함이다. 다들 별일 없이 건너갔는데 나만 건너지 못했다. 결혼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하다. 실제로 가져본 적도 없었으면서 마치 내 것을 빼앗긴 듯한 상실감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서른네 살, 몇 번의 좌절, 일곱 번의 연애일곱 번의 이별은 나를 휘청거릴 지언 정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는 이별 앞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며 젊음을 과소비했다. 러나, 내가 이 정도로 흔들릴쏘냐. 그래, 칠전팔기랬다. 그는 나에게 제법 힘겨운 크기의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원망에 사로잡혀 그를 미워하며 나를 갉아먹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결혼 준비라도 해봤네. 고맙다.



나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내가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던 일곱 번째 연애를 끝냈다.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를 보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다짐했다. 비록 오늘은 눈물에 흐려지는 길을 걸으며 사랑의 얄팍함 앞에 처량 맞은 한탄을 하고 있지만, 나는  없이도 잘 살았었고, 그러므로 그가 없어도 계속 잘 살아갈 것이다. 나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사랑했었고, 착각이었더라도 사랑받았다 느꼈으니 그걸로 됐다. 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도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이해할 것이다. 당장은 상처가 아프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상처가 아물고 나면 전보다 강해진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넘어져도 주인공처럼 멋지게 일어나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나는 대로 내 삶이 초라해지지 않게 할 것이다.



얄팍한 사랑 따위에 좌절하기엔
나는 여전히 내가 너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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