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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Jul 05. 2022

역시 닭강정 정도는 되어야겠지

마음의 구멍을 메우는 방법


그와 파혼식간이었. 무엇이든 빠르게 결정하고 추진력 있게 진행하는 것이 그의 매력이었는데, 파혼도 그렇게 독단적으로 정해버릴 줄이야. 그에게는 나도 그저 해치워야 할 그 많은 '무엇' 중 하나였을 뿐이었나 보다. 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별로 인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고, 보란 듯이 당당하게 살 거라며 눈에 힘을 주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방구석에 틀어박히기'였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왜 이렇게 되었지? 마음은 이미 지옥이었지만 전개가 너무 갑작스러워머리까지 지옥의 열기가 지 않은 느낌이었다. 슬픔도 분노도 분명한 실체 없이 진공상태를 왕왕 떠다니는 것 같았다.


천장만 보고 있는데 친구 L이 연락이 왔다. 별 목적 없는 안부 인사였는데 하필 내가 파혼한 직후여서 얼결에 처음 파혼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L도 몹시 당황해했다. 나의 몇 번의 연애를 지켜본 L도, 이번에는 쟤가 정말 결혼하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물론 나도 이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다. 동화 속의 'Happy ever after'가 내 인생에도 정말 있었구나. 사랑은 정말 존재하는 거였다며 기뻤다. 책장만 덮으면 끝나는 이야기인 줄 모르고.


"분명, 진짜 사랑이 있을 거야. 난 믿어."


L은 가끔 저렇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땅으로 처박혀 세상이 다 삐딱하게 보이는 파혼 직후의 인간에게 사랑이 믿음 같은 어여쁜 단어 와서 꽂힐 리가 만무했다. 동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랑? 사라앙? 야, 세상엔 영원도 없고 사랑도 없어! 나의 빈정 섞인 확신에 L도 확신으로 답했다.  



네가 했던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 거야.
진짜 사랑이었다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었어야 해.




모든 걸 이겨내는 사랑이 정말 있을? 확실히 그는 나를 사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랑하는 자신에게 취해있었을 뿐이. 그런데 그는 정말 취해있긴 했을까?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다. 워낙 매사에 떳떳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우리 사이에 문제가 없을 때에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해 성실하긴 했었다. 돌이켜보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이상 속에 그려놓은 '행복한 결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 나를 조금만 이해해달라고 부탁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도 해주지 않는 것이 너무 슬프다 말하는 나를 앞에 두고 그토록 냉정하게 할 수 있었겠지. 그래, 진짜 사랑이었다면 그럴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밀어내도 내가 끝까지 그를 놓지 않았으면 달라졌을까?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도 내 욕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이해받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이해하고 희생하기로 결단했다면 진짜 사랑이 되었을까? 결국은, 내 탓인 걸까. 전부 내 잘못인 걸까.


L은 나에게 뭘 좀 먹었는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L 내일 속초에 여행 갈 예정이었다며 닭강정을 사다 주겠노라 말했다. 닭강정... 좋지.. 하지만 내 마음은 지옥이니, 지옥 불에 닭강정을 던져봤자 닿기도 전에 재가 되어 버릴 거다.




다음 날,  마음은 지옥에 있더라도 몸은 현실에 기에 정시에 출근을 했다. 솔직히 집중은 잘 되지 않았지만 몸이라도 현실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속초에 도착한 L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파랗고 청량한 초여름의 동해바다를 찍은 영상을 내왔다. 좋은 풍경보고 기분 전환하라는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영상 속에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고 바다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맑음을 보니 내 마음이 얼마나 시궁창인지가 새삼 느껴졌다. 구멍 난 마음에 바닷물을 아무리 붓는 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줄줄줄 흐르기만 할 뿐이다. 철썩 -  철썩 - 꼭 바다가 우는 소리 같다. 아무리 예뻐도 뭍에 닿지 못하고 부서지는 파도.. 부서진 것이 파도인지 나인지...


[파도 소리도 슬프네...]

[아냐, 그거 슬픈 거 아니야.]


나의 감상을 단호하게 끊은 L은 멋진 풍경을 몇 장 더 찍어 보냈다.




L은 이튿날 아침에 닭강정을 들고 집 앞으로 왔다. 택배로 보내면 하루 더 걸리고 맛이 없다고 했다며 직접 사 들고 왔다. 솔직히 직접 올 거라 생각도 못했어서 감동이었다. 하지만 감동을 표현하기에 나는 기운이 너무 없었다. L이 괜찮냐고 묻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L은 내가 글썽이는 걸 처음 봤다며 약간 놀라워했다. 본디 나는 우는 일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눈물 흘려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는 것은 창피한 것이라 배우며 자라서 인지, 나는 슬픔을 눈물로 발산하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좀 울었어? 아니. 나 그런 거 잘 못하잖아. 욕 좀 시원하게 해 봤어? 그럴 기운도 없어. L은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닭강정을 내밀었다.


"많이 먹고 많이 슬퍼해. 슬퍼하려면 잘 먹어야지.

욕도 시원하게 해 보고."


L을 배웅하고 집에 들어와 닭강정 박스를 열었다. 더덕 닭강정이었다. 매콤 달달한 윤기가 자르르한 태를 보니 배가 고팠다. 입맛이 없어서 몇 끼니를 걸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닭강정을 하나 입에 넣으니 꾸덕하면서 바삭하고 촉촉한 식감에, 맛있다, 가 절로 나왔다. 앉은 자리에서 혼자 한 박스를 거의 다 먹었다. 배가 부르니 기운이 나고, 기운이 나니 눈물도 좀 흘렀다. 역시 닭강정 정도는 되야 구멍 난 마음 막을 수 있나 보다. 쌓이지 못하고 줄줄 새던 눈물이 차올라서 넘치는 모양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내 편일 거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버려졌다. 나는 힘을 내서 그를 미워해보고도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수 없음을 알았다. 최선을 다해 그를 미워하더라도, 내가 그를 사랑한 크기에 견주지도 못할 것이다. 차라리 나를 미워하는 것이 더 쉬웠다. 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를 사랑했던 내가, 사랑을 믿었던 내가, 그를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버려서 이렇게 크게 상처받아버린 내가 미웠다. 바보같이, 왜 그랬어. 나는 나를 탓하게 된 것이 가장 슬펐다. 이제 앞으로는 사랑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사랑이라 믿어도 그건 내 착각일 것이다. 몇 번의 이별들이 슬프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상처가 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내 전부를 다 했기 때문이리라. 



그를 사랑해도 미워해도
결국 고통스러운 것은 나였다.



이별에 대해 곱씹어봐도 괴로움 밖에 없었다. 친구가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닭강정을 먹고 힘내어 한다는 것이, 고작 스스로를 원망하고 힘들게 하는 거라니. 그가 나를 남보다도 못하게 대했던 것에 상처받았으면서, 나부터도 남에게도 못할 비난을 나에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친구가 와 같은 슬픔 속에 있다면, 나는 뭐라고 할 것인가. 적어도 왜 그랬냐 타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잘못 없다고, 지금은 슬프겠지만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여전히 많고 너 또한 여전히 귀하 위로할 것이다. 덤덤하고 단호한 L 다운 방식으로 내게 바다를 찍어 보내고, 먹고 힘내라며 닭강정을 사 온 것처럼. 


[고마워. 진짜 맛있다.]


더덕 닭강정은 맛있었다. 며칠 냉장고 뒀다가 먹어도 맛있었다. 나를 파괴하는 에너지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래서 나는 닭강정으로 구멍을 메운 마음 눈물 채우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눈물 대신 더 값진 것으로 채우자. 방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보듬을 수 있는 것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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