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아 Jul 05. 2022

파혼했는데, 어쩌라고요?

불효녀는 울지 않는다.



서른네 살은 이별에 슬퍼할 여유가 없다.



바닥에 떨어진 마음은 대략 먼지만 털어내고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했다. 랑은 끝나도 나의 인생은 계속되기에- 슬픔의 구렁텅이에 '퇴근 후에', '혼자 있을 때'만 빠져야 한다. 출근해서는 당당하고 빈틈없는 직장인의 가면을, 퇴근 후에는 밝고 의젓한 딸의 가면을 쓰려니 사실 상 통근시간만이 표정 없는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음 편히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못하는 현실이 쓰기도 했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도 없는 나의 일상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결혼을 계획하며, 나도 경조휴가와 육아휴직을 써보조금 기대했었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중인 팀원의 일까지 죄다 떠맡아 초과근무만 하다가 회사 복지는 맛도 보지 못한 채 이렇게 인생 끝나나 했는데, 이제 드디어 내 차례가 오는구나. 지금까지 직장 생활하면서 올려온 성과에 공백이 생기더라도 나의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휴직할 거야, 라며 상상하고 다짐했었더랬다. 결국 내 차례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고, 내 커리어는 앞으로도 공백이 없게 되었지만. 혼에게만 일을 몰리는 것이 억울하다생각해서 벌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혼운은 없지만 직업운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출산율에 기여할 수는 없으니 미래에 내 연금을 내 줄 꿈나무들을 낳고 기르시는 분들 뒤치다꺼리라도 해야지... 그래, 일이나 하자... 엉망진창이 된 마음은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한 채 꽁꽁 동여매서 내 방 서랍에 깊숙하게 넣어두었다. 바쁘게 현실을 처리하다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마주해야 할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부모님에게 파혼 말씀드리기로 결심한 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괴로움에 떨었다. 지는 해를 따라 내 마음도 땅에 처박히고 있었다. 부모님 모르게 연애만 했다면 그냥 나 혼자 내색 없이 마음 정리하면 그만 이었을 텐데. 내년 초에 결혼하겠다며, 식장 계약하기 전에 인사드리는 거라고 설레발치지나 말걸 그랬다. 그와 파혼하기 전날까지도 아빠는 예비 사위는 또 언제 오냐며 매일 물었고, 엄마는 예비 사위에게 밥 해줄 거라며 식재료를 잔뜩 사 와서 연신 다듬고 계셨다. 앞으로 계속 볼 건데 바쁜 사람을 뭘 그리 독촉하냐고 핀잔했었는데, 우리에게 '다음'은 없었다.


결혼 생각 없다며 뻗대던 딸이 드디어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한껏 들떠 계시던 부모님에게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그가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며 문제 삼은 것 중에 큰 부분이 우리 부모님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부유했던 조부모님 덕택에 평생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아오신 분들이고, 게 얻은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이 대단한 분들이다. 그는 우리 부모님이 딸을 결혼시킬 생각이 없으신 것 같다고 했다. 하기야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에서, 엄마는 울면서 내가 립적으로 굴어서 섭섭했던 얘기를 몇 시간 동안 풀어놓고 아빠는 부모는 자식 절대 못 놓는다고 거들었으니 어느 남자가 좋다 할까. 충분히 그렇게 느꼈을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해라고, 부모님이 내가 어떻게 자란 사람인지 말해주려다 보니 감정이 벅차서 그런 것뿐이라고, 나는 누구보다 이 집을 벗어나고 싶고, 애초에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딸도 아니라고, 내가 부모님에게 거리 둬서 상처받으신 얘기 들었지 않느냐고, 딸 시집보내는 부모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주면 안 되겠냐고 그에게 아무리 말해봐도, 그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며 단칼에 잘라버렸다. 게 그렇게까지 이해받지 못할 수준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가 그를 더 붙잡지 못한 이유는, 그가 질려버린 이유를 나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덕에 부족함 없는 지원을 받고 자랐고 그 부분은 늘 감사하지만, 나는 항상 이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 살 이후에는 한 집에 살아도 부모님과는 점점 거리를 뒀다. 관심과 간섭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걸 거부하며 사생활은 지켜달라며 선을 그었다. 이 집을 너무 떠나고 싶어서 대학 졸업 후에는 일부러 최대한 멀리 떨어진 대학원에 진학했었는데,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 살았던 그 몇 년이 나에겐 숨통이 트이는 소중한 시기였다. 엄마는 아직도 시기 동안 서운해서 매일같이 울었다며 종종 말하지만, 명절에나 한두 번 얼굴 보는 그때가 나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기숙사에 나가 살다가 서울에 직장을 구하게 되어 본가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 4년 전. 그때 느낀 답답함에 익숙해지지 말고 바로 나갔어야 했다. 돈이 좀 모였기에 작은 방이라도 구해 독립하겠다 했다가, 울며 잡는 엄마를 뿌리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 때라도 나가 살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 부모님에 질려 나에게 독립할 생각이 있긴 하냐며 파혼을 말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결혼을 서두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있었는데, 그의 입장에선 잘라낼 수도 없는 나의 부모가 담스러웠을 거다. 결혼을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한 나의 잘못이다. 나만 경제적, 심리적으로 자립되어 있으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냐며 맞춰가자는 나에게서, 그는 서둘러 도망가버렸다. 결국 나는 부모에게는 매정한 딸이고,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로 남아버렸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부모님에게 전할 수는 없기에, 나는 그가 말하던 이별 사유와 그와 이별할 때 나누었던 말들을 복기하며 대본을 만들었다. 혹시 부모님을 탓하거나 마음 쓰이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도록, 진실은 적당히 숨기되 거짓은 없도록 첨삭하고 또 첨삭했다. 나의 상처를 부모님에게 전가시키지 말자. 그분들은 딸을 애끓게 사랑했을 뿐, 더 냉정하게 끊어내지 못한 내 탓이다. 이 이별에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차분하게 파혼 소식을 전하자. 그렇게 되뇌는 동안,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약간의 평화가 드리웠던 내 마음에 지옥이 성큼 들어앉았다.




퇴근 후, 부모님께는 각자의 좁혀지지 않는 경제관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노라 설명드렸다. 부모님은 혹시 본인들의 말실수로 그가 기분이 상해서 결혼을 엎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다. 


"그런 건 아니야. 실망시켜 드려 죄송해요."


"아니야, 우린 너만 찮으면 다 괜찮다.

아프면 아픈 척도 하고, 슬프면 울기도 하고 그래. 속으로 참지 말고. "


우습다. 울지 말라, 아프다 징징대지 말라 키워놓고 이제 와서 뭘 어떻게 참지 말라는 걸까. 우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배우며 자라서 나는 슬퍼도 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울어 속이 짓무르는 어른이 되었어요. 아파도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며 상처를 덮어버려 곪아 터지는 어른이 되었어요. 원망의 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지만 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또 좋은 사람 있겠죠, 라며 꾹꾹 눌렀다.


"네가 20대면 모를까, 그런 사람 너한텐 이제 없."


리 엄마는 몹시 냉정하게 말하며 돌아 앉았다. 여자 나이 서른 넷이면 냉혹한 결혼시장에서는 매력 없는 상품이라지만, 뭘 저렇게까지 아프게 말할까. 틀린 말은 아닌 그 말 한마디가 꾹꾹 누르던 마음에 와서 가시처럼 콕 박혔다. 평소에 워낙 간섭하지 말라 열내는 딸이었다 보니, 부모님 보시기에는 내가 지랄 떨어서 파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그래, 어차피 상처뿐인 마음 가시 하나 더 박힌다고 대수겠느냐. 나도 파혼으로, 부모 마음에 못 하나 꽂았으니 하나씩 주고받은 셈 치자. 속이 상해서 저러시겠지. 꾹꾹, 꾹꾹... 원망의 말들을 누르면 누를수록 그에게 받은 상처가 찢어지고 벌어졌다. 






그래도 엄마의 말에 2차 상처를 받고 나니 오히려 부채감은 덜어졌다. 부모님의 실망감에까지 나는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돌보아야 할 나의 아픔보다도 그 죄책감이 가장 곤란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부모님 탓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는 다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도 완벽한 부모가 아닌데
나라고 완벽한 자식일 수는 없다.



내 기준에서 나는 착하고 성실한 딸인 거 같은데, 부모님 기준에선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자기 잘난 줄만 알고 사는 세상 차갑고 못된 년이다. 반면에 그는 착하고 대견하기만 한 아들이라서 부모님에 반하느니 차라리 나의 희생을 설득하는 효자였다. 나는 우리 부모님도 인정한 매정하고 나쁜 년이니까. 파혼해서 부모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 한들 천하의 나쁜 년 밖에 더 될까. '불효자는 웁니다!'라지만, 사실 불효하고 후회하며 우는 건 효자들이다. 나는 효녀가 되기는 이미 글러버렸으니 앞으로도 되지 않기로 했다.


파혼한 당사자는 '나'이고, 누구보다도 크게 상처받은 것도 '나'이다. 나는 내 아픔부터 돌보아야겠다. 부모의 상처는 그분들이 풀어야 할 몫이다. 나라도 나에게 말해줘야겠다. 비록 파혼당했고, 서른 넷이라 상품 가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기죽지 말라고. 근데 뭐, 어쩌라고? 라며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