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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Oct 24. 2022

선물 다발 같은 시간


오랜 불면증 때문에 커피를 끊고 차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 3년 전쯤. 지금은 차의 매력에 퐁당 빠져버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으로,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말한다. 그렇게 예사로이 매일 차를 마신다. 일과 중 차를 마시는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내게 항상 도움 되는 건 아니었다. 불면증이 더욱 심해져서 찾아간 병원에서는 커피는 물론이고 차도 마시지 말라고 했다.


"차에도 카페인이 있어요. 되도록 드시지 마시고 오후 3시 이후에는 절대 드시지 마세요."


오후의 티 타임도 하지 말라니.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프다. 그래도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문득 모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했던 명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딱히 오래 살 이유가 없다.'



불면증 약을 먹어도 약 기운이 떨어질 시간이면 눈이 번쩍 떠진다. 주말 아침도 예외는 없다. 해도 아직 채 뜨지 않은 시간. 오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주말을 길게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지만 이내, 주말에 늦잠을 즐겨본 적이 언제더라, 라는 생각이 따라와 뭔가 마음이 아쉬워진다.


'차를 마셔야겠어.'


불면증 치료에 좋지 않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다시 잠들 수 있을 리 없는 이 새벽에 마시는 차 한 잔은 괜찮을 거다. 어느 때보다도 부지런히 찻자리를 준비한다. 선물 받은 꽃다발 앞에 선물 받은 다구(茶具)와 선물 받은 차 그리고 선물 받은 간식을 차린다. 그리고 햇빛을 대신하기 위해 선물로 받은 조명을 밝혀본다. 아직 푸르렀던 여명이 따듯한 빛으로 물든다. 이 선물 받은 찻자리에 내가 산 건 찻잔 하나뿐이다. 바라보니 뿌듯하고 마음이 흡족했다. 아침이 오기도 전 눈이 떠지면 다시 잠들지 못함에 괴로워했는데, 오늘은 덕분에 차를 마실 시간이 생겼다. 선물 받은 시간에 마음이 충만했다.


각각 선물 받은 차와 간식은 신기하게도 페어링이 훌륭했다. 달달하고 바삭한 머랭 쿠키가 얼그레이의 향기와 만나니 혀에 머무르는 달콤함이 은은하게 비강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얼그레이의 텁텁하고 쓴맛은 머랭 쿠키의 달달함이 달래주었다. 이미 깨어버린 아침을 새롭게 깨우는 시간. 선물로 받은 것들은 늘 새롭다. 나의 취향과 선물해 준 이들의 취향이 적절하게 섞여있어서, 마치 나의 세계가 조금 확장되는 듯하다. 분명 혼자인데, 다 같이 티타임을 갖고 있는 착각마저 든다. 선물 받은 시간에 행복했다.


선물은 늘 좋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기쁜 일은 그리 많지 않은데, 선물은 단순히 물건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할까 또는 뭘까 하는 기대감, 그리고 나의 세계를 나누었다는 혹은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쁨, 나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존감 같은 것들. 선물 받은 마음들과 함께 하는 갑자기 생긴 시간. 마치 선물 다발 같은 순간이었다.  


해가 뜬다. 지긋지긋한 불면증이 내게 선물 받은, 어느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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