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포기
당시 내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통해 성적순으로 원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내신점수와 연합고사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내가 바라던 지역 명문고등학교 커트라인에 정말 간당간당했고, 원서를 넣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안전하게 한 단계 낮은 고등학교를 권하셨다. 자칫 연합고사를 망쳐버리면 먼 지역으로 튕겨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합리적으로는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도 잠시였고, 나는 고민 없이 그 명문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4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집정원에서 초과되어 성적순으로 이 인원들은 원치 않은 곳으로 가게 될 운명에 놓였다.
하지만 내가 이 선택을 고민 없이 하게 된 이유에는 형의 존재 때문이었다. 형이 이미 이 명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내가 만약 형과 같은 레벨의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16세의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스토리를 아는 지인들은 '형은 형이고, 너는 너야. 왜 그래'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생겨버린 나의 콤플렉스는 이때부터 시동을 걸고 있었다. 아니, 이미 질주하고 있었다.
모험을 시작한 이상 나는 어떻게든 연합고사 성적으로 결과를 뒤집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원서를 낸 이후에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고, 반 친구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졸업을 기대하며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친구들이 놀자고 하든, 모든 것에 귀를 닫기 시작했다.
아침에 교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앉아 책을 펴서 공부를 시작했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모두 아껴가며 책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공부는 하교 이후 바로 독서실로 이어졌다.
독서실에 도착해서 작은 휴게실에서 삼각김밥 1개와 초코우유 1개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는 나는 새벽 1시까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독서실은 부모님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아이들도 많아서 키득키득 그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도 많은 곳이었지만, 나는 그런 소리들이 이상하게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내 생활은 Ctrl + C, Ctrl + V 그 자체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신 성적을 제외하고 연합고사 성적만으로는 1학년 같은 반 친구들 중에서 2번째로 높은 점수로 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입학하기 전 몸이 뭔가 평소와는 다른 것이 느껴졌고, 종합병원에 가서 간단한 검사들을 진행했다.
다른 부분들은 특별한 이상이 없었지만, 발견된 건 '중증의 특발성 척추측만증'이었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사진 상으로 경추는 30도 정도, 요추는 35도 이상 비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수술인가 했더니 쉽게 말해 전신마취를 하고 척추에 못을 박아 강제로 1자로 만드는 수술이라고 하셨는데, 수술 이후에는 평생 동안 허리를 일반 사람들처럼 구부리지 못하고 운동도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수술 자체가 위험한 대수술이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도 이런 충격이 있을까.
부모님과 나는 넋이 나가버렸고, 고민 끝에 부모님께서는 수술은 너무 위험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찾은 방법은 '보조기 착용'을 통한 교정 치료였다.
내 몸에 딱 맞게끔 신체를 정밀하게 측정하고는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야 특수제작된 보조기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착용을 하는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과 통증이 느껴졌다. 이 보조기도 강제로 뼈를 피는 것이라 이미 휘어버린 척추가 움직이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보조기를 착용하고 걸음을 걷는데, 로봇이 걷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으며 불편감이 엄청났다. 그렇게 서울에서 보조기를 맞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가 많이 있던 때가 아니라 뻥 뚫려있는 역이 대부분이었다.
고통이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그때 마음은 마치 맹렬한 야수처럼 승강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그 지하철에 뛰어들고 싶었다. 솔직히 그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이 보조기는 밤에 잘 때와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쉬지 않고 착용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 보조기와 도저히 친해질 수 없었고, 끔찍한 고통은 매일매일 지속되었다.
그리고 고통을 참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게 되어 지금도 표정 없이 가만히 있어도 내 미간에는 선명하게 팔 자(八)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아픈 건 아픈 거지만, 어느덧 나는 새로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1학년이고 우리 형은 3학년으로 같은 명문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부모님은 꽤나 자랑스러워하시는 거 같았다. 그 사실 하나만은 나는 보람 있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야간자율학습은 물론이고, 하루를 거의 전부 학교에서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옆에 보이는 수많은 친구들도 내신과 모의고사, 수능까지 모두 경쟁자였다. 나도 당연히 공부를 하고 싶었고,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는 동시에 보조기가 더욱 나를 조여왔다. 공부를 하려면 선생님과 칠판, 책도 봐야 하고 필기를 하려면 허리를 숙이는 등 몸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픈 보조기인데 조금씩 몸을 움직이려 하니 끔찍한 고통이 내 의식을 점점 흐리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수업을 들으려 교실 맨 뒤에 서서도 있어보고 나름대로 행동해 봤지만, 이 고통을 이기기엔 내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참고 참다가 한계에 다다르는 날에는 수업 도중 양호실에 잠시 보조기를 빼고 거친 숨을 내쉬며 누워있는 날이 많아졌다. 당연히 체육시간은 한 번도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내가 학생으로 학교에 있는지, 환자로 학교에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 나는 결국 1학년의 절반도 마치지 못하고 자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들어온 고등학교였지만, 포기하는 건 정말 쉬웠다.
어려서부터 욕심도 많고 당차게 뭐든 이뤄냈던 나였지만, 17세의 내가 인생에서의 첫 번째 큰 포기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인생을 싣고 운행 중이던 배는 점점 출렁이고 망가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