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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Oct 25. 2024

영천 사람들

피난길

피난길

 

"병은아~"

"병은아~"


책상이 놓인 사무실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잔뜩 웅크린 남자들의 등허리가 산 속에 듬성 듬성 놓인 이끼 낀 바윗돌 같았다.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청년부터 두툼한 피부에 주름이 선명한 3, 40대까지 신체가 자유로운 남자는 모두 입영대상이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 사이로 발을 끼워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사무실 안을 뒤졌다.


"병은아~ 병은아?"


안쪽 벽에 붙여 놓은 책상 아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의 눈이 빠르게 좇았다.

시커먼 머리카락 사이로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빛에 반짝 거렸다.


"병은아! 너! 빨리 나와"


"으흐흑, 혀, 혀"


"빨리! 나와!"


남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잡아당겨진 듯 휘청거리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서울이 국군에 의해 곧 안정되리라는 예상은 틀렸다.


초여름 어느날 밤 멀리서 들리는 포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한 겨울이 되어 한강이 꽁꽁 언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이제 가자. 짐 싣고 애들은 마차에 태워. 정균이는 명자, 명희 잘 챙겨라"


'네, 아버지"

두 살 터울의 삼촌이지만 정균은 명자와 명희를 이불보따리 틈에 앉혔다.

짐을 묶은 끈으로 아이들을 한데 둘러서 혹시라도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단속을 했다.

끈을 당겨 확인한 후 정균도 마차 가장자리로 들어가 조카들과 몸을 꼭 붙이고 앉았다.

겨울을 기다리며 조금씩 준비해 두었던 누룽지 보따리를 옆구리 틈에 끼워넣었다.


기다리던 피난이었기에 채비는 금방 마쳤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했지만,

할머니는 방마다 잠금쇠를 걸고 대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확인하는 동안 마차는 독립문 대로로 나왔다.

한강을 건너려고 길을 떠나는 인파가 골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차에서 떨어지지 말고 정신들 바짝 차려"

카랑카랑한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세차게 훔쳤다.

왈가닥 풍자 이모도 얌전히 할머니 옆에 붙어 있었다.

영숙은 마차 뒤에서 아이들을 한 명씩 바라봤다.

혹시라도 잃어버린다면,

정균이부터 명희까지 얼굴을 꼭꼭 새겨두는 것이었다.


"아가, 춥지? 셋이 꼭 붙어 앉자"

어디까지 가야할지 모르는 출발

추위를 견뎌야하는 아이들을 위해 이불과 옷가지 보따리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으로 아이들을 끼어넣듯 앉혔지만 온기가 없는 이불 울타리로는  바람만 막을 뿐이었다.


무거운 마차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일곱 식구가 한강으로 향했다.

도강하는 사람들이 강을 메우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국군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전쟁이 끝날 것인가 잠시 안심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무악재를 넘어오는 중공군은 서울시민들을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몰아 넣었다.

영숙은 아이들이 자란 후에도 문득 문득 그 날을 회상했다.


"무악재길을 가득 메우고 떼놈들이 내려오는데, 아주 시커멓게 내려왔어.

길을 꽉 메우고 끝도 없이 개미떼처럼 넘어오더라.

근데 양팔이 그냥 번쩍번쩍해.

시계며 팔찌며 찰 수 있는 만큼 손목부터 팔까지 잔뜩 차고 있는거야.

손가락에도 가락지가 다 끼워져 있고. 아이고. 그 때 생각하면 아주 소름이 돋는다.

떼놈들하면 아주 치가 떨려"


떼로 몰려와서 떼놈이라고 부르던 중공군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들어오던 날,

전쟁이 끝나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위태위태하게 집을 지키던 사람들은 서둘러 짐을 싸고 약탈을 일삼는 중공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떨었다.


"일본놈들이 쳐들어왔을 때도 잘 버텼어.

정신대 끌려갈까봐 숨겨놨던 영순이도 저렇게 시집가서 잘 사는데, 이까짓 전쟁이라고 못 이길게 뭐야.

한강도 얼었다고 하니 내일 아침에 나서자고"


마차를 끌고 가는 뒷모습이 짐에 가려 보이지 않을만큼 아담한 몸집이지만 할아버지는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살이 에일 정도로 추위가 깊어진 1월, 수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가다가 폭탄이라도 맞지 않을지

삶의 희망보다 죽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


강가에 다다라서 할아버지는 서둘러 도강하지 않고, 건너는 사람들의 모양을 살폈다.

강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앉아서 변을 당하는 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다.

개미떼처럼 밀려 나오는 사람들을 감당할 만큼 강이 단단하게 얼었을까?

강을 끝까지 건너는 사람들이 어떤 길로 가는지 눈으로 좇았다.

만날 "내가 열아홉에 시집을 와서~ 고생 고생하는데"하며 억울한 마음을 꺼내며 바가지를 긁던 할머니지만,

할아버지가 중요한 일에 신중하고 눈이 예리한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강둑에서 유심히 강 너머를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가자"

하고 출발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일곱 식구는 잠자코 그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 주변의 소리까지 작아지는 것 같았다.


영숙은 머리 수건을 고쳐 매고 아이들의 볼을 순서대로 손으로 꼭 감싸 쥐며 체온을 나눴다.

세 아이 모두 팥 주머니를 꼭 끌어안은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등에 업혀, 손을 잡고 걸려가는 또래 아이들이 그들 옆을 지나갔다.


'불쌍한 것들. 어린 것들이 제일 불쌍하지'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에 얼어붙은 얼굴이 따갑고 붉게 부풀었다.

죽음의 목전에서 영숙은 눈물을 닦아내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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