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은 부엌에서 반찬거리와 곡식을 챙겨 함지박에 담았다.
흐르는 눈물을 꾹꾹 닦아내며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두고 가야할 지 생각하려 애썼다.
새벽녘에는 어렴풋이 들리던 포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북에서 탱크가 내려온다는 소식에 허둥대다 차분하게 정신을 차리고 피난 갈 준비를 시작했지만 마음처럼 선뜻 집을 나서게 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켜 둔 라디오에서 전하는 내용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서울에서 멀리 떠나야 할 것 같은데 국군이 서울 수비를 잘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에 집을 나서야할 지 말아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문설주를 붙잡고 한 발은 대문 안에 한 발은 대문 밖에 두고 있는 형국이었다.
"요즘 새로 지은 집들은 지하실이 다 있네"
아현동 새 한옥에 신접살림을 차린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머니들이 주고받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뒷곁 쪽마루 아래 작은 문을 들어 젖혔다. 한여름인데도 냉기가 올라왔다.
한사람이 겨우 내려갈만한 폭의 계단을 옆걸음으로 내려갔다.
그릇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자기그릇에는 엊그제 만들어 둔 음료수가 담겨있었다.
그대로 두면 썩어버릴 음료수와 김치독을 들어 계단 위로 옮겼다.
대청 아래 지하공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훈훈해서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을 필요도, 우물물에 과일이며 음료수를 담궈둘 필요도 없었다. 몇시간만 넣어두면 찬공기에 열기가 식고 겨우내 얼지 않게 김치며 무, 배추도 두고두고 먹을 수 있었다.
한여름 등목을 하고 대청에 대자로 누우면 오싹해질 정도로 시원해지는 것도 지하실 덕분이었다.
차곡차곡 넣어두었던 김치독, 새우젖독을 지하실 안으로 밀어넣고 들고가지 못할 살림살이를 부지런히 옮겼다. 이불짐, 갈아채울 기저귀, 옷가지, 곡식과 오래 보관해두고 말린 나물과 생선을 빼놓고는 모두 집에 두고가야할 것들이었다.
주인 없는 집에 두고가는 짐들이 온전할리 없겠지만 방마다 버젓이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해방되고 놋그릇, 은비녀를 뽑힐 일이 더는 없겠다 안심했던 것도 잠시였다는 생각에 불현듯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짐을 옮기다보니 계단 앞까지 발디딜틈없이 공간이 채워졌다.
불이 없어도 금새 눈이 밝아져 이것저것 정리할 수 있을만큼 어렴풋이 사물이 보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계단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심연의 공간이 되었다.
무거운 판자로 만든 문을 젖혀 닫고 흙을 조금 퍼서 위를 덮었다. 돌절구통을 그 위에 옮겨 놓고나니 지하실의 존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살림 단속을 하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영숙을 병은이 꼭 끌어안았다.
이대로 집을 떠날 준비를 마쳤지만, 그 때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왜?'
'어떻게?'
안전하다고 연신 서울을 지키라던 목소리가 한강철교가 파괴되고 미아리고개로도 탱크가 밀려들어오고 있으니 어디로든 서울을 떠날 수 없이 당신들은 갇혔다고 말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신히 붙잡아두었던 두려움이 폭풍처럼 모든 것을 뒤덮었다. 팔꿈치로부터 무릎으로부터 명치끝으로부터 타들어가는 듯한 절망이 퍼져나갔다.
"시내에 가서 어떻게 된건지 듣고 오는게 낫겠어"
병은이 집을 나선지 한 시각도 안 되어 골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명자 엄마. 명자 엄마"
"왜 그래요?"
"화신 백화점 앞에서 명자 아빠가"
"네?"
"명자 아빠 뿐이 아니라. 남자들을 막 끌고 간다네 아이고 어떻하나?"
"왜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전쟁이 났으니 젊은 남자들이 성할리 있어?"
"남자들이.. 이걸 어째요?"
이른 아침 집을 나섰던 진성이네, 병수네 아버지도 군용 집차에 실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전세가 심각해지자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도 징집 대상이 되었다.
골목 안 사람들 모두 소식을 듣고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영숙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명희를 업고 고사리 같은 명자의 손을 잡고 보따리를 인 채 집을 나섰다.
거리는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로 인해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명자를 바짝 끌어안고 걸었다.
아이는 제발로 걷는 것보다 어머니 품에 들려 옮겨지고 있었다.
'정신 차려야 해'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며, 충정로를 지났다. 산처럼 짐을 실은 우마차와 사람들이 뒤섞였다.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 독립문. 대문을 벌컥 열었다.
대문 안은 고요했지만
대청과 마당을 가득 채운 눈이 일제히 대문을 향해 '스삭'하고 움직였다.
"언제 오나 했다"
영숙의 어머니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달려나와 명자를 품에 안았다.
흙먼지를 쓸어내리는 할머니의 손길에 아이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영숙이 이고 온 짐은 벌써 마차에 올려져 있었다.
영숙은 포데기를 풀러 아이를 대청에 내려놓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명자 아범이 아침에 군인들한테 끌려 갔어요. 형님네 올라갔다 올게요"
무엇도 기다릴 겨를도 없이 가볍게 몸을 돌려 대문으로 뛰어 나갔다.
오르막길도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상관없이 영숙은 내달렸다. 한달음에 도착한 집 대문을 쾅 쾅 두드렸다.
'아직 떠나지 않았기를...'
"형님. 형님. 명자어멈이예요. 형님"
"동서! 여기 왠 일이야?"
"형님. 아주버님께 명자 아범 좀 찾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아침에 화신 백화점 앞에서 집차에 실려 갔다고. 헉, 헉"
숨보다 빨리 뱉어내는 말에
기골이 좋은 아낙네는 더 길게 묻지 않았다.
"알았어. 한강다리가 끊겨서 우리도 못가고 있어. 동서는 아줌니네로 올라와 있는거야? 일단 가 있어. 내 얼른 소식 전할게 걱정말고"
"네. 감사해요"
영숙은 왔던 길을 다시 달렸다. 먼지와 땀이 눈물과 범벅이 되었다. 손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닦아냈다.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
대청에 옹기 종기 모여 앉은 가족들만 열 댓명. 지지직 전파가 고르지 않은 라디오 방송이 들리지 않을 만큼 엄마를 기다리던 명희가 빽빽 우는 소리가 높아졌다.
"엄마 데려와. 엄마~ 엄마 데려오라고"
"엄마 곧 온다. 제 엄마 빈자리를 어찌 이리 잘 알꼬"
"엄마, 아부지"
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영숙의 모습에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버님네도 아직 피난 안 가셨어요. 찾으면 이리로 연락준다고"
"그래, 군인들이 데려갔으면 병철이네가 찾아주겠지"
"아버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요?"
어른들 틈에 앉아 명자와 몸을 기대고 있던 정균이었다.
"기다려보자. 미아리 고개도 막히고 한강다리도 끊겼으면 어디로 갈 수 있겠냐? 우리가 총 칼 든 것도 아닌데, 설마 멀쩡한 사람들한테도 총을 들이밀까"
"아이고 그 놈의 소리만 믿고, 피난도 못가고"
"죽일놈들, 전쟁이 났으면 피난을 가라고 해야지. 괜찮다는 소리만 하고"
포격 소리는 더이상 멀지 않았다.
인민군은 고양을 지나 무악재를 넘고 있었다.
7살 정균 5살 명자 3살 명희
어린 것들을 보고 있자니 어른들 마음은 바닥으로 쿵 쿵 내리찍히는 것만 같았다.
영숙 아버지는 짐마차에서 짐을 풀렀다.
"이북에서 여기까지 내려왔으면 피난은 못 가는 거야. 한강을 건널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어? 일단 짐을 옮기고 다들 방으로 들어가 있어"
안방문을 열고 보따리를 넣었다. 묶었던 짐을 풀지도 못하고 척척 쌓아둔 틈으로 아이들이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