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에도 밥은 챙겨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주먹밥이지만, 비닐 채로 전자레인지에 데워야 해서 환경호르몬 생각을 안 할 수는 없게 된다. 자궁아 미안.
격리 마지막 날. 비록 아침에는 비몽사몽 전날 쓱배송으로 시킨 주먹밥만 데워 먹었지만, 이제 출근을 해야 하니까 정신 차리고 집에 있는 남은 채소들을 먹어야 한다. 나름대로 목표의식을 갖춘 채 오전 업무를 호로록 끝내고, 최근에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거의 비우지 않았던 모니터 앞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 끼니의 주인공은 가지랑 양파. 마트에서 가지를 3개 샀었는데, 엄마가 또 3개를 주셨어서 본의 아니게 가지 부자가 되었었고, 언니랑 나름대로 먹는다곤 했는데도 3개가 그대로 남아버렸다. 안 되겠다. 점심은 가지다! 최대한 많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레시피를 뒤적거리다가 바로 발견한 버터 가지구이 덮밥. 마침 버터도 마지막 한 조각이 있어서 이거다 싶었다.
가짜 같지만 진짜 피다. 박혔던 안쪽에 그대로 고였다. 겸사겸사 열심히 그렸던 손톱 꽃이 잘 보이는 사진.
일단 가지를 열심히 씻어서 꼬다리를 잘라내고.. 아야. 뭐지, 살짝 따갑다 했더니 자세히 보니 가시같은 게 살에 박혀있다. 손톱으로 살살 뽑아내고 보니 피가... 피가. 세상에, 가지에 가시라니. 가지라곤 매끈한 단면만 생각했지 가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한테 징징대 보았지만 그걸 이제 알았냐고 하셔서 본전도 못 찾았다, 흑흑.
칼집을 내면서 어쩐지 뭔가 요리다운(?) 걸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씻은 가지는 꼬다리를 도려내고 반 자르고, 격자로 칼집을 내 준다. 자르는 김에 냉장고에 절반이 남아 있던 양파도 대충 먹기 좋게 잘랐다. 옆에 살짝 보이는 양념(큰술 기준)은 굴소스 1 진간장 2 고춧가루 1 (나는 매운거 싫어서 0.5) 맛술 1 설탕 1/2 물엿 1로 만들라고 적혀 있었는데, 실수로 설탕이 한 숟갈 가득 부어져서 물엿을 0.5를 넣었다. 우리 집에 물엿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지만, 캬 이 양념 너무 맛있더라. 이건 꼭 기록하고 싶다. 멋진 블로거 분의 맛난 양념장이었다.
다 하고 블로그 영상을 보니 버터를 이렇게까지 넓게 펼칠 필요는 없더라.
전날의 망한 양배추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 가지는 열심히 키친타올에 물기를 닦아 두었다. 그리고 팬에 열심히 버터를 녹여서, 칼집 부분부터 가지를 올렸다. 노릇노릇 구워지면 뒤집으랬는데, 아래가 안 보이는데 노릇노릇해지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그래서 결국 두 번씩 뒤집었다. 하하.
아앗. 양파사진이 없네. 다 구운 가지는 팬에서 잠시 빼 뒀다가, 그 자리에 올리브유 한스푼을 올리고 양파를 볶았다. 투명해질 때까지 볶으랬는데 난 아직 얼마나 되어야 투명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타지 말라고 꽤 열심히 뒤적이며 기다리다가, 양념장 투하! 갑자기 소리가 엄청 시끄러워지지만 무시하고 물 2/3컵(120미리라지만 대애충)을 붓는다. 원하는 만큼 졸이고 마지막에 참기름도 두르면 좋다는데 그건 지금 처음 봤다. 끝까지 볼 걸. 그래도 맛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기 위한 노오력.
나름의 베스트 픽! 집게로 집다가 가운데가 조금 찢어져서 슬프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그릇인 면기에 밥을 덜고, 양념에 졸인 양파를 좌악 붓고 난 뒤 탐스러운 가지를 올려 장식한다. 버터 향과 단짠의 소스가 어우러져서 정말정말 맛있었다. 심지어 가지를 자르겠다고 나이프까지 꺼내 오니, 어쩐지 그럴 듯하게 밥을 잘 챙겨먹은 멋진 으른이 된 기분! 다음에 버터 더 사와서 꼭 다시 해 먹어보고 싶은, 정말 마음에 드는 메뉴였다. 아차, 다음에는 참기름이랑 고명도 꼭 올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