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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Oct 10. 2021

바다 빛 당신 13. 어린이 마음

13. 어린이 마음

1945년 7월.    


동순이에겐 비밀이지만, 오빠는  동생이 오늘 연극에 참가하려고 연습 중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동순이가 오빠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성 데레사의 집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와서 보육원 아이들과 연극 연습을 하고 간다는 소식을 보육원 수련수녀인 양 아가다로부터 들은 것이다.        

 

푸룩투오사 수녀님께서 성체용 제병을 굽다가 물었다고 했다. 동길이가 걱정하는 동생은 어디에 살고 있냐고. 처음에 양아가다 수련수녀는 관다리 너머 눈 튀어나올 정도로 큰 저택에서 살고 있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단다. 얘기하는 김에 고백까지 하자면, 친일파와 한통속이라는 사실까지 흘렸단다.

     

그런데도, 푸룩투오사 수녀님은 빈자들의 움막을 방문하러 외출하는 길에 동해문화 집에 들르셨단다. 신기하게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동순이와 마주쳤는데, 동순이는 신학교로 떠나버린 제 오빠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는지, 수사님과 수녀님이 무엇을 하는 분인지 이미 알고 있었고, 베일을 쓴 푸룩투오사 수녀님을 보자마자 성 데레사의 집에서 오셨냐고 물어보았단다. 수녀님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동순이는 수녀님을 탁 믿어 버리고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고 울었단다.    


“엄마가 아픈데, 오빠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녀님은 담벼락에 앉아서 동순이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옆에 있어 주셨단다. 동순이의 작은 어깨를 감싸고는,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우리는 언제나 볼 수 있다.’는 말을 마음으로 가르쳐 주셨는데, 동순이는 그 비밀을 수녀님에게서 들은 순간 너무나 행복해졌고,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바로 성 데레사의 집에 푸룩투오사 수녀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양 아가다 수련 수녀였지만 말이다.    


“아들이 수녀님 독일 말을 알아듣는다는 거이 진짜래요!”     


속에 있는 말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는 양아가다 수녀님의 특징은 다른 수녀회에선 몰라도 ‘성 데레사의 집’과는 썩 잘 어울린다. 음악과 의학과 어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정결하고 당당하게 걷고 있는 조선인 수녀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양아가다처럼 오지랖 넓고 마음이 여물지 못한 수녀는 흔치 않다.     


남들은 전문학교라도 졸업하고 혼처를 알아볼 나이까지, 시골집 부엌에서 일생을 보낸 그녀는. 눈만 뜨면 새벽같이 일을 나가는 농사꾼의 딸로.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들과 동생들의 밥을 해 먹이고 그릇 씻고, 찬 담그고, 빨래 빨고 하는 것이 원래 하던 일인지라, 보육원에서 아이들 밥 해먹이고, 그릇 씻고, 빨래 빨고 하는 것이 특별한 희생 일리가 없다고 말 한다.     


“제 오라비를 기쁘게 해 줄 량이니,

 비밀을 엄수해 달라 앙증을 떨지 아니하오?”    


동순이가 비밀을 지켜 달라고 천사처럼 앙증을 떤 사람이 하필 마음속 말은 하나도 감추지 못하는 양아가다 수련 수녀님이라니. 덕분에 동길이는 오늘 밤 세상 누구보다 기쁠 것이지만, 며칠 전부터 세상 누구보다 기쁜 상태로 살게 되었다.     



만약 오늘 연극에 새엄마도 오신다면, 먼저 다가가 안아 줄 준비도 되었다. 당신의 아픔이 진정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며, 행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오시게 손을 잡아 드릴 것이다. 성체 조배실에서 밤을 새워 드린 기도를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들어주셨다.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 (Drunten im Unterland ) ”    

첫 무대는 작곡가 윤석중이 깊은 산속 옹달샘으로 개사한 독일 민요를 독일어 가사 그대로 연습한 아이들이 나와서 푸룩투오사 수녀님과 함께 합창했다.     


drunten im unterland, da isn's halt fein.

저 아랫마을은 정말로 멋지다네.

schlehen im oberland, trauben im unterland

언덕엔 자두가,  들판엔 포도가

drunten in unterland moch'i wohl sein

저 아랫마을엔 나도 가서 살고 싶어요~      

 

합창이 끝난 가난한 마을에 두 명의 오누이가 등장하면서 두 번째 무대인 아이들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우리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베네딕도가 주인공인 이 연극은 베네딕도와 그의 쌍둥이 누이동생 스콜라스티카의 어린 시절 행복을 올망졸망 엮었다.  

   

주인공이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가 아닌 다른 어린이들은 그 남매와 함께 노는 자연으로 분했는데, 소나무라든지, 오리, 나비, 사슴, 꽃, 지렁이 등이 되어 서로가 얼마나 아름답고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순이는 떠돌이 시냇물의 역할을 맡았는데, 언젠가는 꼭 바다로 가기 위해 그 마을에 흘러들어 온 시냇물이었으나, 목이 마른 자연 친구들을 위해서 바다에 가지 않고 그 마을의 옹달샘이 되기로 했다. 어린 베네딕도는 나중에 이 옹달샘을 비로 바꾸어 다리가 아파서 옹달샘까지 오지 못하는 스콜라스티카의 곰 친구 및 모든 살아있는 대 자연에게 뿌려 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기발하고, 천진스러운지. 아이들의 연극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고, 기쁨이 넘쳐났다. 베네딕도 성인의 축일을 맞아 열린 이 작은 연극을 보기 위해  모인 툿칭 포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수녀들과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님들, 그리고 성 데레사의 집 환자들과 가족, 여러 신자들의 얼굴에 행복이 퍼져갔다. 두 달 전,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의 전쟁은 종식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라 독일인 수도자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전쟁과 학살의 주범인 자국이 이기길 바라는 수도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전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라, 일본도 머지않아 제국의 야욕을 꺾을 것이라는 예견에 올해 여름은 조선인의 불행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느긋했다. 나라와 처지에 상관없이 모여 앉은 어른들은 여름 옥수수와 찐 감자를 나눠 먹으며, 배꼽 빠지게 웃고 박수를 쳤다.


마지막은 독일의 민요이지만 이젠 조선의 동요이기도 한 깊은 산속 옹달샘을 우리말로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은하수를 뿌린 밤하늘보다 더 반짝이는 어린이들의 마음이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아이들의 무대에 동순이도 끼어 있었다. 연극을 보러 둘러앉은 어른들의 마당엔 동길이도 낄 자리가 있었다. 새어머니는 오지 않으셨지만 가족이 서로 바라보고 행복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매에겐 감격적인 밤이었다.     



“오빠~!!!”     


연극을 마친 동순이가 동길을 향해 뛰어왔다. 시냇물로 분장해서 온통 파란칠을 한 얼굴과 팔다리로 동길에게 안겼다. 대뜸, 가장 급한 질문을 꺼냈다.    


“나 잘했지?”

“모다 잘했지비!”   

  

동길이가 배운 사투리를 써가며 별처럼 반짝이는 동순이의 눈동자에 세상 누구보다 큰 기쁨을 전할 때.

     

“사진 찍어 드릴까요?”     

묻는 소리는 아녜스였다. 유미옥 아녜스.


놀라서 돌아보니, 그녀는 미제 고급 사진기를 목에 걸고 남매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자신의 오빠 태주와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동길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그 마음까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또 보네요. 베드로 오빠.”     


더 이상 기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에 또 하나의 빛이 더해지자, 동길은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아..”     

외에는 어떤 말도 못 하고, 다시 한번 영혼이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데.  

   

“오빠가 보내 주었어요.”     


하고, 아녜스가 먼저 사진기를 들어 보이는 것이다.

    

“사진 찍을 때 치-즈! 하는 건 아시죠? 제가 오늘을 기념해서 찍어 드릴게요.”

“.. 고맙습니다.”     


동길은 엉겁결에 동순이를 허리춤까지 안아 올려 사진을 찍었다. 펑!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빛 폭탄이 터졌다. 동길은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고.

 더 환하게요.

 한 번 더! ”    


태주가 하던 냥과 같이 아녜스도 동길을 향해 구김살 없는 웃음을 보냈다. 그 웃음에 동길이 마음도 편해졌다. 동길은 다시 한번 자세를 취한 후 동순이와 밝게 웃었다.     


“치- 즈!”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순이를 유미옥 아녜스와 함께 유 박사님의 자동차에 실어 보낸 후, 동길은 수도회 선배들을 따라 문천으로 돌아왔다. 밤 기도를 끝내고 잠을 청해야 하나, 도무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이 밤에, 동길은 홀로 기뻤다.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수도원 계단을 뛰어내려 마당으로 나왔다. 하느님께서 우리 남매에게 특별히 쏟아부어주신 은혜에, 마음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감사! 또 감사! 뿐이었다. 하늘의 별빛, 휘영청 밝은 달, 달빛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들, 풀벌레 우는 소리, 여름 포도 내음, 두엄 내음 다 같이 뒤섞여 날아오는 밤바람. 이 모든 자연이 동길에게 자기들만의 고유한 색과 소리와 감촉과 생명을 가지고와 살아있는 생명의 기쁨을 풀어주고 갔다. 온 우주가 동길과 함께 숨을 쉬고 내뿜으며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다.    

     

수도원 앞마당 작은 호수까지 나는 듯 내 달려도 부풀어 오른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까만 어둠이 깔린 호수의 수면 위에 노란 달이 떠있었다. 그 빛으로부터 호수엔 거울 같은 은막이 생겨났고, 그 빛으로 인해 수면이 밝았다. 내 마음이 밝았다.

 

‘사람은 빛을 볼 수 있다!

자연을 느낄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에게 존재의 기쁨을 알게 하신 분, 사랑의 폭발을 보게 하신 분은 창조주 한분이시다.’   

   

어떻게 태어났든, 어떤 방향으로 가든, 모든 아름다움의 끝, 모든 선함의 끝에는 빛이신 주님께서 계신다. 이 선명한 사랑의 확신 앞에서 동길은 창조주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겠노라 서원했다. 무릎을 꿇었다. 흙에 이마를 대었다. 풀에 입을 맞추었다. 빛 샘물이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한없는 기쁨이 마음속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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