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아주오래도록
오랜만에 자고 있는 당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여전히 곱고,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문득, 젊은 시절 예쁘디예뻤던 당신의 웃음이 떠오릅니다.
그 미소 하나에 반해 시작된 세월이 벌써 이만큼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함께할 날들이 더 적어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한 일이 과연 있었던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별것 아닌 일에도 짜증을 부리고,
모든 걸 당신 탓으로 돌리며 나는 내 허물을 감추려 했습니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큰소리친 일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묵묵히 참아주셨습니다.
긴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고, 또 얼마나 속으로 나를 원망하셨을까요.
그저 ‘함께 산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당신에게 폭군이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눈물로 용서를 구한들,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들이 다시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남은 삶은 당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해 주세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밤마다 뒤척이시는 당신.
얼마나 힘드신가요.
평생 한량 같은 남편 곁에서 서운함도, 짜증도, 화도 많으셨을 텐데
그 모든 걸 꾹꾹 눌러 참아오신 당신.
이제 당신도 칠순입니다.
이제는 내려놓아도 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온 당신.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걸.
당신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놓지 않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때로는 매정해 보였지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희귀병을 앓는 딸을 살려냈고,
천문학적인 병원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5% 안에 드는 경제적 여유 속에서 우리 가족은 스키, 수영, 요트, 골프,
25개국 35회의 해외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게 당신 덕분입니다.
꿈같은 삶이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삶이었습니다.
오늘, 문득 함박꽃을 봅니다.
아니, 어쩌면 이 나이에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본 것 같습니다.
하얗고 해맑은 그 꽃은 꼭 당신 같았습니다.
당신의 웃음,
당신의 지친 뒷모습,
그리고 말없이 나를 떠받친 손길…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은 오롯이 당신이었습니다.
내가 지켜온 자존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나를 감추기 위한 교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마음 아파도 말 못 하고,
속으로만 삭이며 살아온 당신의 가슴은 아마 까맣게 타버렸을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께 용서를 구하며 이 글을 씁니다.
사랑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그저 사랑을, 단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무수한 날들 속 말하지 못한 내 진심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딸아이는 혼수상태에 빠진 지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당신은 한 번 죽었다 살아났고, 나는 아직도 변하지 못했습니다.
매년, 매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어린아이가 됩니다.
왜일까요.
당신 앞에서는 늘 철부지입니다.
후회와 감사, 그리고 사랑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 새만금에서, 어느 여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