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늙기 전에, 한 잔 하세나 친구야"
친구야.
며칠 전 추석에 고향을 다녀온 뒤,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띵합니다.
아, 이젠 형제들도 예전의 그 형제들이 아닌가 봅니다.
동생들이야 피라도 섞였으니 억지로라도 ‘형’이라 부르겠지만,
제수씨들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 마음에 들지 않네요.
한마디 하려다 괜히 말싸움이 날까 싶어
장손 체면에 꾹 참았더니만, 머리가 다 아픕니다.
밥도 안 먹고 올라오려다가
늙으신 어머니께서 서운해하실까 억지로 드시고 오긴 했는데,
소화가 되겠습니까…
아마 어머님 돌아가시면, 고향도 이제 그만이겠지요.
생각해 보면, 내 아내가 종부 노릇 제대로 못한 것도 내 탓이고,
내 아들이 장손 노릇 못한 것도 결국 내 책임입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제기랄 마누라는
"딸아이 병시중에, 무능한 남편 뒷바라지에, 먹고살려니 그랬다"라고 하지만,
아들 녀석까지 왜 이리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짓마다 마음에 안 들고,
말이라도 곱게 할 수는 없을까 싶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가슴속에서 끓고만 있네요.
남들은 아들 자랑에 열을 올리는데,
나는 아들 자랑 한 번 못 해봤으니…
이제는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식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
이제야 정말 실감이 납니다.
모든 걸 주고도 자식의 배우자에게까지 소외당하며
최저의 삶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초라한 현실…
그게 네 일 아니고 내 일이 아닐 거라
누가 감히 장담하겠는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결국, 모두 내 업보요, 내 탓이겠지요…
친구야.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을까요.
어느새 내 나이도 종심을 넘고 있으니.
그 많던 꿈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죽으면 몇 푼 남기고
잠깐 머물다 떠나는 인생일 뿐…
잊혀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야.
오늘따라 네가 무척 그립습니다.
할 이야기가 없다 한들,
보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겹고 편안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더 늙기 전에,
제 발로 걸어 다니고,
제 돈으로 소주 한잔 살 수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세.
세월 따라 퇴색해 가는 우정이지만,
잊혀 가는 어린 시절의 마음을 다시 한번 불 지펴보세나.
지치고 힘든 순간,
말없이 어우러 주고,
말없이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세.
퇴근길에 전화나 하시게.
소주 한잔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