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전하는 말, 사랑합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떠올리며,
남겨 두지 못한 말들과 후회,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글에 담습니다.
이 글을 쓰며 다시금 아버님 앞에 선 듯,
그리움이 깊어집니다.
1부: 아버지를 다시 모신 날
아버님이 떠나신 지도 어느덧 29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저도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
오늘은 당신을 더 뜻깊게 기리기 위해
자손들과 함께 대전 국립현충원에 당신을 다시 모셨습니다.
동네 선산보다는,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귀히 모셔질 이곳이
아버님께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파트로 말하자면 ‘맨션’이요,
말동무도 많으시지요.
옆에는 전우들이, 가까이엔 천안함 용사들도 있으니
이젠 외롭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홀로 일구어낸 삶의 뿌리였습니다.
그 씨앗들이 자라나 이제 서른 명 가까운 자손으로 퍼졌지요.
그러나 그중 하나, 당신을 닮은 다섯째는
먼저 당신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 아들이 훌륭히 자라 명문 고등학교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은
기적 같았습니다.
흰 손수건을 달아주시며
저의 손을 꼭 잡고 웃으시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 미소, 처음 본 아버님의 따뜻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당신은 늘 무서운 존재였지요.
지금은 압니다.
여섯 남매를 키워내며
당신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셨는지를.
“돈이 들어가니 수술은 하지 않겠다.”
“이 땅은 너희들 것이다.”
그 말씀 하나하나에
당신의 고집스러운 사랑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때로 상처가 되었습니다.
형제간 다툼으로 등을 돌린 세월이 있었고,
장남으로서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참고, 견디고, 화합하려 애썼습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이제는 장남으로서의 ‘영’도 사라졌습니다.
경제력도, 목소리도 없습니다.
아내에게 용돈을 얻는 것도 부끄러워
이름 없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용돈이나 벌어 씁니다.
그런 저를 보신다면
아버님은 아마 한숨을 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2부: 아버지의 빈자리, 그리고 제자리
이제는 장남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형제들의 우애를 위해,
남은 가족을 위해,
무언가 더 해보려 하지만,
늦은 감이 큽니다.
당신의 장남은
이제 고개 숙인 채 하늘을 봅니다.
딸아이의 병간호 25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네가 잘돼야 집안이 선다”던
당신의 말씀을 되새기며 버텨왔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급히 가실 필요는 없으셨잖아요.
당신의 친구들은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당신이 없는 집안은
기둥이 빠진 것처럼 흔들렸고,
저는 기댈 곳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우둔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뇝니다.
당신의 유산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더 화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지키려다 서로 상처를 입었고,
그 아픔은 아직도 다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당신이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자손들이
이제 쉰 명을 넘어섰습니다.
다섯째의 아들은 K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연구원이 되어 결혼도 했습니다.
당신의 손자들이,
당신의 씨앗이
이토록 아름답게 열매 맺었습니다.
3부: 아버님, 그립습니다.
이제야 글로 불러보지만
벌써 세상 떠나신 지 오래이니
아버님 목소리도 가물가물합니다.
살아계실 적에는
왜 그리 무뚝뚝하고 서먹하기만 했는지요.
정작 고마움과 미안함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남겨두신 건
소박한 살림살이,
낡은 사진 몇 장,
그리고 묵묵히 살아내신 삶의 흔적뿐이었지요.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버님,
제가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당신의 고단했던 하루가
저희를 키워낸 밑거름이었음을,
그 침묵이 오히려
깊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음을요.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그늘 덕분에
저는 지금 이만큼 살아왔습니다.
아버님,
이 글을 하늘에서 읽어주실까요.
못다 한 효심,
갚지 못한 은혜가
이토록 가슴에 남아 아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슬픔만이 아니라
감사로 기억하려 합니다.
살아 계실 때는 못다 한 말,
이제 글로라도 전합니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