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수현 Sep 10. 2021

육아가 지칠 땐 영어를 외워요

부캐는 미국 엄마 (5화)

“쑤디는 스트레스 풀 때 뭐해요?”


아나운서로서의 마지막 방송이 끝나던 날, 송별 회식 자리에서 작가 누군가가 물었다. 여기에서 ‘쑤디’는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불리던 애칭. 스트레스 푸는 방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마다 일치하기도 혹은 아예 다른 페이지에 있기도 하다. 적당한 답변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도 있었다. “미드 봐요… 혹은 뭐 잠자기 전에 책 읽어요.”와 같은 류의 대답. 근데 그날은 마지막 회식 자리였던 만큼, 진짜 ‘내’ 답변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어렴풋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진짜 ‘나’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말하면서도 멈칫멈칫… “저 조금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데... (뭔데 뭔데) 영어 단어 외워요.” (순간 정적)



“스트레스 풀 때 뭐해요?”
“영어 단어 외워요.”


잘난 척하려는 것도 아니고 있어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근데 ‘영어 단어 외우면서 힐링했다’는 건 실로 진짜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브런치 독자들 앞에 두고 맹세한다.)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내게 영어공부는 살면서 늘 숙제 같았다.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가장 많이 했던 건 유학 결심을 한 뒤 토플 공부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글들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당시 회사 파업으로 인해 방송을 한참 쉬던 때라 열몇 시간씩 수험생활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노조 간부를 찾아뵙고 공식적으로 개인 공부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수험생활에 매진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단어와 문장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맛에 ‘힐링’ 효과를 느끼기 시작했던 건… 마음이 복잡하고 세상 살기 힘들단 느낌이 드는 개인적 정체기가 찾아오려 할수록 난 ‘영어’를 더 찾는 습관이 생겼다. (영어실력과는 상관없음 주의)


단어 외우기. 까다롭고 헷갈릴수록 외우고픈 중독의 맛


그렇다. 그 시간만큼은 난 자유가 된다. GRE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 단어집을 펴고 평생 쓸까 말까 한 단어를 읊조리고 써보고 (철자가 길기도 길다), 또 그 이상야릇한 단어를 문장에 넣어보고 하면서 다른 복잡한 생각을 찬찬히 잊어나간다. 요즘은 영어뉴스에 나오는 문장 몇 개를 골라 영어뉴스 앵커처럼 따라 읽어보고 달달 외워보고 아기 유모차를 밀면서 하늘 한번 쳐다보고 읊조리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면서 그나마 해독되는 느낌을 갖는다. (‘육아’ 일상을 ‘독’이라고 표현해서 미안, 아가야. 엄마도 힘들어서 그래.) 그게 바로 ‘스트레스’ 받을 때 착수하는 나만의 미션.


왜 하필 외국어 공부야, 그냥 이 생각 저 생각 다 내려두고 영화나 드라마 봐도 되는 거 아냐… 누군가는 아니꼬울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러한 방법들은 복잡다단한 현실 속의 화와 응어리들이 철저히 지워주는데 영 부족했었다. 주인공한테 감정 이입하다 보면 내 현실과 과거가 단연 겹쳐지는 때도 있지 않던가. 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단언컨대 뭔갈 외우는 게 최고다. 치유가 필요하다면! 물론 꼭 영어단어나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았겠구나. 러시아어나 독일어도 그런 면에서 꼭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더 거대한 스트레스를 풀려면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더 큰 장벽의 언어를 앞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


새벽녘, 보채는 아기를 달래려고 깼다가 영어문장 조곤조곤 외워보는 미라클 모닝의 현장


고로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영어공부를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인 즉, “아, 쟤가 힘들구나,,, 요즘 좀 힐링이 필요한가 보구나.” 신호라는 것을. 시간이 여유롭게 남아 자기 계발하고 싶은 욕심에서만 영어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단어나 문장을 달달 외면서 무언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최소한의 힐링 노력이다. 이렇게라도 하면 바닥까지 친 마음이 조금은 살아남을 느끼니까.


회사생활이 어렵고 맘 같지 않을 때도 단어장을 끼고 살았지만, 육아인으로서 육아 일상을 지냄에 있어서 무엇이 다를쏘냐. 그렇게 듣고 싶던 온라인 영어 클래스를 등록하고 아기를 보며 한쪽 귀로 영어를 흘려듣는다. 아기가 잠든 등 뒤에서 나지막이 영어 표현을 반복해보고 혀를 조금씩 굴려본다. 그냥 그렇게 격한 피로와 화, 순간의 욱함 들을 내리누르고 단정하게 가다듬어 보려 애쓰는 것이다. (아,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렇다고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애써본다.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영어 낭독 이벤트’가 릴레이로 이어지고 있는 풍경들을 자주 마주한다. 아마도 유사한 맥락에서가 아닐까. 영어실력을 조금씩 차근차근 늘려보겠다는 소중한 의지들이 ‘제1의 동기’이겠으나 나처럼 분명 ‘힐링’ 효과를 염두에 둔 이 또한 있으리라 상상한다. 어딘가에서 나처럼 영어를 읊조리며 오늘의 갈증을 덤덤히 채우려 노력하고 있을 그 누군가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렇게 업무 스트레스도 육아 후유증도 산산이 흩어져 가기를 마음 모아 기대한다.  


내겐 너무 특별한 영어공부, 힐링법, 치유제.
이전 04화 아기와 ‘거리두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