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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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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6장: 피해자.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침해 또는 위협을 받은 사람.

칠흑같이 짙은 밤하늘은 무거운 장막처럼 내려앉아, 빗방울이 창문을 마치 도망칠 수 없는 방을 감시하는 감시자처럼 두드렸다. 빗물이 유리 위를 미끄러지며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그것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뇌를 갉아먹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뉴욕, 브루클린. 이 날 밤. 폴의 구두 소리는 빗속에서 점차 울려 퍼지며, 마치 누군가 그를 쫓고 있는 듯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차가운 비는 그의 어깨 위로 쏟아졌고, 도시의 어둠은 그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퇴근길에 집에 도착한 폴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무겁고 압도적인 불쾌감이 그를 감쌌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강렬한 기시감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의 심장은 점점 빨라졌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고자 그는 황급히 외투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손은 분명히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그는 침착한 척 연기를 피워 올렸다. 라이터 불이 어두운 방안을 잠깐 비추었고, 그 순간에도 그는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연기가 그의 폐 깊숙이 들어가고, 폴은 천천히 그것을 내뿜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연기의 흐름처럼 감시의 시선이 그의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창밖에선 여전히 빗방울이 차갑게 창문을 두드렸고, 그 소리는 폴의 불안한 마음을 잠식해 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달랐다. 그 무엇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렬해졌다. 폴은 자신을 삼켜들듯 몰려오는 불안과 공포를 애써 무시했다. 그것들은 그의 일상적인 삶의 무게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생각했다. 그는 갑작스레 직장 상사인 로즈에게 내일 미팅 시간을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느낀 소름 끼치는 불쾌감도, 자신을 따라다니는 감시의 시선도 그 순간만큼은 업무 앞에 무의미해졌다. 폴은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의식처럼 느릿하게 전화기 앞에 섰다. 마치 그가 하는 행위가 이미 결정된 절차인 듯, 다이얼을 돌리는 손은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였다. 금속성이 방 안을 침묵처럼 채웠다. 그 소리는 그의 의식 속에서 멀리 퍼져나갔고, 폴은 잠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에 불을 붙일 때, 희미한 연기가 천천히 거실을 휘감았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마치 무의미한 연기의 흐름처럼 느껴졌고, 폴의 존재는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손끝의 떨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에 닿는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안한 시선 속에서도, 폴은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로즈 양, 잠깐 시간 되나?"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공허한 집 안에 공명하듯이 메아리쳤다. "원스턴 씨, 무슨 일인가요?" 로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현실과 분리된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듯, 폴의 귀에 머물렀다. "로즈 양... 내일 오전에 따로 만날 수..." 폴은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작스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의 집 풍경이 장롱 속에서 반복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장롱 속에 또 다른 폴의 집이 있었고, 그 집 안의 장롱 속에는 또 다른 폴의 집이, 그리고 또다시 장롱 속의 폴의 집이 무한히 순환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혼란에 빠진 폴은 공포에 질린 채로 뒤로 물러섰다. 방 안에 메아리치던 로즈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빗물이 창밖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고요한 공포와 점점 더 깊어지는 고립감뿐이었다. 폴은 깊은 혼란 속에서도 서서히 그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어,’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 자신을 찾아내야 해. 무한히 순환하는 이 감옥은 내 정신을 갉아먹을 뿐이야. 도망칠 순 없단 말이야...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고.’ 그는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았다.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건 바로 폴이었다. 그는 피해자였고, 가해자였으며, 감시자이자 피감시자였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왔을 뿐이었다. '이 순환, 이 끝없는 반복은 아무 의미도 없어.' 폴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장롱 안에 숨은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폴 자신이었다. 그의 집에서조차 그는 스스로를 피해 숨고 있었던 것이다.

로즈는 누구인가? 이 의문은 이제 더 이상 의문이 아니었다. 로즈는 그의 또 다른 얼굴, 그가 결코 만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자아였다. 그녀는 실재하지 않았고, 단지 폴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다. 그는 로즈였다. 그리고 로즈는 그였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자, 폴은 마침내 이 우주에서, 이 바다에서, 요정들의 성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 더 이상 숨지 않기로 결심한 폴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은 뜨여진 채로 강제로 닫혔고, 그가 눈을 감은 순간, 그는 드디어 세상을 보았다. 그가 진정 마주한 세상은 광활한 우주도, 화려한 도시도 아니었다. 폴의 집은 허름했다. 그가 오래도록 외면해 왔던 현실은 단순하고 가혹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은 그의 가난을 더할 나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수도조차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 화장실도 주방도 없는 이곳이 바로 폴이 진정으로 살던 곳이었다. 이층 버스는 없었다. 그가 쫓아다녔던 환영들은 전부 그의 속에서 자라난 망상이었다. ‘이제는 탈출해야 해,’ 폴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탈출이 현실로부터의 탈출일까, 아니면 그의 정신으로부터의 탈출일까? 폴 자신도 그 질문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폴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거리로 나섰다. 쓸쓸한 공기가 그의 낡은 재킷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려 했으나, 그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든 건 환상일 뿐이야.' 그는 다시금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우주여행, 감시, 망상, 꿈, 로즈,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환상일 뿐이었다. 그 환상들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조각나며 희미해져 갔다. ‘난 우주에 간 적도 없어. 꿈을 꾼 적도, 이건 소설의 한 부분도 아니고, 나를 서술하는 누군가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그는 분명하게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단언한 것은 그저 단순한 확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존을 위한 본능과도 같았다. 의문은 그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의문이란 이미 그 마음속에서 완전히 억눌린 채 사라졌고, 폴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조차 부정했다. ‘진실은 단 하나다. 그런 일들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그의 생각은 무겁고 확고했다. 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그 어떤 의문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길고 고요한 거리를 걷는 것뿐이었다. 주변의 회색빛 건물들은 마치 그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왔고, 차가운 공기는 그의 숨을 뱉어낼 때마다 더 짙게 엉겨 붙었다.

폴은 자신의 여정을 곱씹어 보았다. 그가 살아온 모든 것, 그가 본 것, 그가 느꼈던 모든 감정.

그것들이 모여 마치 폴에겐 피카소의 그림, 우는 여인처럼 느껴졌다. 피상적이고도 평면적인 기괴한 경험이 마치 빛이 프리즘에 모이듯 한 점에 모이자, 폴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모든 경험들은 끊임없이 순환할 뿐이었다. '좋아, 그 기억들은 내가 본 거짓이다.' 폴은 자신이 아는 사실들부터 정의했다. '그럼, 어디까지가 거짓이었는가?' 그는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는 그 질문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답이 무엇이든, 답을 인지하여야 그것에서 회피할 수 있을 것이고, 그는 그 무엇보다도 단지 회피하고 싶었지만, 답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그 순간, 그는 담배 연기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세계와 맞서 싸울 힘조차 잃어버렸다. 폴은 고개를 숙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병원에 가야 하는가?' 그 생각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에게 되뇐 답은 변함없었다. '안돼, 그러면 내가 진짜 정신병자처럼 보이잖아.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야.'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모든 혼란을 스스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순간, 한 행인과 부딪힌 충격이 그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그 행인은 경찰이었다. 그녀의 제복은 날카롭게 폴의 시야를 파고들었고, 뱃지 위로 빛이 번쩍였다. 그녀의 몸매와 위엄 있는 태도는 폴에게 묘한 위축감을 안겼다. "죄송합니다, 경관님..." 폴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썩은 표정으로 밀쳐냈다. "거지새끼가... 저리 꺼져."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폴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폴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늘 돌아다니며 폴의 모친과 불륜을 저지른 노숙자, 레드가 있었다. 폴은 언제나 그를 혐오했다. 더럽고, 냄새나고, 삶에 완전히 패배한 사람처럼 보이던 그 존재를. 하지만 지금 그는 깨달았다.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레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몸에선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의 자존감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폴의 곁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폴은 그녀의 담배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불꽃이 사라지며 담배 끝이 붉게 타들어 갈 때, 마치 그의 기억도 서서히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은 교차했고,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그의 속을 꿰뚫는 듯했다. "더러운 새끼들..." 그녀의 경멸 섞인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폴은 속으로 움츠러들었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런 놈들도 꼴에 양복을 입고 사는구만.." 그녀가 말한 시간, 그 짧은 3초 남짓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완벽한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의 시야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하나였다.

'로즈.'

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자, 그의 현실은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졌고, 로즈라는 이름만이 그의 의식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 로즈와 마주했던 순간들이 점차 그의 현재를 덮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름 속에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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