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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Feb 28. 2021

내가 저지른 인생 최고의 멍청한 짓

정신 승리로 마무리

3이 되어 처음 본 3월 모의고사에서 국 3% 안에 들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구나 싶었다. 이대로만 하면 생스러웠던 과거도 영광스럽게 보상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한 3달 정도밖에 못 사실 것 같네요.

아빠가 같이 술 마시던 사람들과 심하게 싸워서 위장 수술을 받았을 때였던 것 같다(별의별 일을 하도 많이 겪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3달밖에 없다니……. 당황스럽고 슬펐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정의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뒤얽혀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타이밍 한번 기가 막다 싶었다.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아빠 생각이 나면 금세 눈앞이 뿌예졌다. 인생무상의 공허함이 밀려오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1분 1초가 아까운 마당에 며칠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나면 밀린 진도 때문에 또다시 무기력해졌다.  


곧 있으면 아빠가 돌아가실 수 있는데 이렇게 공부만 해도 되는 걸까? 어떻게 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빠에게 병문안을 가 공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치면 아빠 생각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어느 곳에도 마음을 온전히 두지 못했다. 전국의 수많은 고3과 재수생들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나만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 더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수능 전날, 병원 앞에서 파는 군고구마 한 봉지를 사들고 아빠에게 갔다. "내일 시험 잘 보고 올게."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방구석에 누워 한참을 뒤척여봐도 밤늦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아빠가 무사히 퇴원했다. 변한 건 없었다. 아빠는 다시 건강해졌고, 죽음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또다시 주야장천 술을 마셨다. 정말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수능을 망쳤고, 내 세상만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3월 모의고사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교사'의 꿈은 어느새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임 선생님은 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추천해 주셨지만 교사 말고 다른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이제 와서 전공을 다시 선택하려니 아무것도 성에 차는 게 없었다. 꼴도 보기 싫은 수능 성적표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제발,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 고모가 대학 지원 문제를 상의해 주러 집에 찾아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까 등록금이 저렴한 국공립 대학으로 지원하는 게 좋지 않겠니?"


가난하면 대학도 '성적순'이 아니라 '등록금 순'이라는 게 서글펐다. 게 어쩔 수 없는 내 현실이었다.


가군은 교대 넣었다. 버리는 카드일지언정, 한 번은 꼭 넣고 싶었다. 나군은 국공립대 윤리학과로 안전하게 하향 지원을 했다. 임용고시를 봐서 중,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는 생각이었다. 다군은 국공립 대학이 거의 없어서 아무 데나 넣었지만 '당연히 나군에 붙겠지'라는 생각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못되겠지만 윤리학과에 가서 윤리 선생님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 있었다.


드디어 나군 대학 면접 날밝았다. 점수를 많이 낮춰서 지원했기에 면접을 못 봐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그만큼 면접 비중이 굉장히 적었다). 그런데 이 날, 인생 최대의 멍청한 짓을 저질러버다. 


사실 며칠 전에 학교 가는 길을 알아볼 때부터 이미 불안 불안하긴 했다. 그땐 지금처럼 길 찾기 앱도 없던 시절. 터미널만 해도 어쩜 그리도 많은지. 동서울터미널, 시외버스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 그리고 영동선, 경부선 이런 건 또 뭐야? 지방 대학까지 가는 길은 도통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 천지였다. (기서 일단 1차 멘털 붕괴)


당시의 나를 좀 변호하자면, 친척들 모두 서울에 살아서 평생 한 번도 지방에 내려가 본 적이 없었고, 교대를 못 간다는 좌절감에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푹 퍼져버린 상태였다. 면접 준비고 뭐고, 세상만사 다 귀찮고 모든 게 다 부질없다~ 싶은 그런 상황. 한마디로 허무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다 네가 알아서 해라, 라며 공부든 대학이든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면접에 대해서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면접장까지 가는 길을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오 마이 갓! 뭐 이렇게 버스가 띄엄띄엄 다녀? 터미널에만 가면 동네 버스처럼 수시로 버스가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2시간 뒤에 출발한다고? 아뿔싸. (2차 멘털 붕괴. 털썩.)


한참을 기다린 뒤에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더다. 이러다간 면접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대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면접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은데, 혹시 제 차례가 되기 전까지만 도착하면 되나요?"

"아니요. 면접 첫 순서가 시작되면 아무도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럼 면접 점수 빼고 수능 성적으로만 처리되나요?"

"면접 안 보시면 자격 자체가 안 돼요. 수능 만점을 받아도 불합격입니다." (3차 멘털 붕괴. 바사삭.)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졌. 이렇게 멍청하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이 날만큼 스스로가 한심스럽던 적이 없었다. 결국 그날 대학교 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음에 안 드는 현실이어도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러야 했다.


내가 정한 길 외에는 전부 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실패'라고 처음부터 못 박아버리니 도무지 그 길을 걷고 싶지가 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바꿀 순 없었다.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가짐 하나뿐이었다. 이젠 실패라 생각하지 고 새로운 길이 생각하기로 했다. 새로운 건 틀린 게 아니라 낯선 것일 뿐이니까.


탓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탓이든 내 탓이든, 탓하기만 해서는 달라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실수를 통해 배웠으면 된 거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느라 값진 시간 낭비하진 말자.


내가 생각했던 최선의 선택이 물 건너갔으니 이 상황흘러가는 대로 맡겨보기로 했다. 회피가 아니라 삶에 나를 내어 맡기는 일이었다. 계획한 대로만 살던 내가, 피나는 노력만이 최선이라 여기던 내가, 힘을 빼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이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헛물만 들이키듯, 로는 긴장을 풀고 기다리는 게 최선일 지도 모른다. 진짜 중요한 순간 힘을 쓰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할 시간도 필요 법이니까.


가끔 어마어마하게 큰 일을 저지르면 오히려 어이없을 만큼 쉽게 용서될 때가 있는데,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접 기회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으로 돌아와서 싸이월드 대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고난이 축복의 통로가 되길."


지금 보기 좋은 일이 나중에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 지금 일어난 나쁜 일 나중까지 나쁘리란 법 을 것이다. 신인상을 탄 사람이 자만하다가 반짝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긴 무명생활 끝에 늦게 빛을 본 사람이 겸손한 태도로 오랫동안 사랑받는 걸 보면, 지금의 고난이 오히려 먼 훗날의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의 작은(?) 실수도 나중에 일어날 어마어마 실수를 미리 막아준 걸지도 모른다며, 어이없는 하루와 다사다난했던 고 3 기를 신승리로 아름답게 마무리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나니 오랜만에 두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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