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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뚝 ttuk Jan 03. 2023

우울은 수용(水溶) 성

따뜻한 물이 주는 포근한 감촉에 평온해지는 마음.



ⓒ pixabay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겨울, 뜨끈한 물에 몸을 담글 때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는 육성. "아따~ 살 것 같다." 긴장하느라 한껏 수축되어 있던 목과 어깨에 힘이 풀리면서 금세 노곤노곤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보금자리에 온 듯한 기분이다. 몇 년 전 삿포로에 갔을 때,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설산배경을 뒤로한 노천탕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머리 위로는 찬 바람이, 몸 아래로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었다.


유독 몸과 마음이 지친 날에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곤 한다. 따뜻한 물이 주는 감촉은 마치 호텔식 침대 매트리스처럼 닿자마자 포근함이 느껴진다. “오늘 너무 힘들었지? 고생 정말 많았어.” 라며 토닥토닥 위로를 해주는 기분이다. 지금 이곳에서라면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다는 안심이 든다.


미온수(微溫水). 뜨겁지는 않을 정도의 따뜻한 물로 욕조에 물을 받아놓는다. 그리고 물이 일정량 채워질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어느새 욕실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해졌을 때쯤, 욕조에 한 발씩 담그면서 가슴 윗부분까지 차오르기 기다린다. 그렇게 넘칠 듯 말 듯 욕조 물이 채워졌다면 눈을 감고 내 몸을 그대로 맡긴다. 목을 뒤로 편안하게 젖힌 뒤, 후우~ 날숨을 내쉬면 온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린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하는 샤워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같이 날이 추울 때는 레버를 온수로 돌려놓고 샤워기를 거치대에 걸어놓은 다음, 따뜻한 물줄기가 목 어깨를 타고 몸 구석구석 흘러내리는 감촉과 온도를 느끼기에 딱 좋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근육들이 안마기 마냥 말랑말랑하게 풀어진다. 거기에 좋아하는 향의 바디워시로 뽀송뽀송하게 닦아주기까지 하면 그날의 꿀잠은 해결된 셈이다.



   작년 한 해 유독 일종의 공황증상처럼 갑작스럽게 숨이 턱턱 막히며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압도감에 휩싸여 곤란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욕조에 들어가 잠깐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남은 하루를 소화할 수 있는 에너지만큼 만이라도 충전한 뒤, 무탈히 집만 갈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지출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밖에서 한참을 방황하다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결국 며칠을 끙끙 앓기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안전한 공간에서 잠깐의 휴식이 절실한데, 여의치 않는 상황에서는 참 이도저도 못하고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3년간 잘 피해 다녔던 코로나에 확진되는 바람에 고통스러웠던 며칠을 보냈는데 그때도 유독 수분보충에 기를 썼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몸을 닦아준 젖은 수건을 걸어서 가습효과를 내주고, 미지근한 온도의 물을 넣은 가습기와 함께 침대 맡에 항상 따뜻한 물을 담은 대형 보온병을 두고 잤는데 이 덕분에 조금이나마 빨리 회복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가을이 완연한 어느날, <좋은생각> 잡지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 글의 맥락과 일치해서 꼭 공유하고 싶었다.


‘쉬다’ 라는 낱말은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몸을 편안히 두다. 일이나 활동을 잠시 그치다’ 라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 더불어 ‘쉬다’라는 말에는 ‘빛깔을 곱게 하려 뜨물에 담가두다’ 하는 뜻도 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천천히 숨을 쉬어보았던 시간 같은 것으로 이 겨울날이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계절산문>,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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