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수 없던 길

by 카북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 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 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후회가 없어진다. 내가 내린 모든 결정, 내가 겪은 모든 힘든 일들이 과정으로 보인다.

어떤 행동이, 어떤 경험이 지금의 나라는 결과물의 과정이 되면, 내가 내린 모든 선택, 내가 한 모든 행동이 필연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우연을 만나고, 그런 우연들이 쌓여서 내가 되는 것이지만, 우연이 지나가고 나면, 우연이 필연이 된다. 참 모호하면서 재밌다.


이 시는 거쳐오고 싶지 않은 길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이 시를 계속 읽다 보면, 발 디디고 싶지 않던 길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걸어온 모든 길들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기대감이 생긴다. 인생을 길게 보면,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은 과정에 불가하다. 내가 사주나 타로를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인생은 1차원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하는 실패는 겪지 않을 수 없는 실패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할 결정들, 내가 할 실패들이 조금이나마 덜 두려워진다.


내가 걸어온 길들은 가지 않을 수 없던 길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피할 수 없는 걸 알면 조금은 덜 쫄고, 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전에 조혜련 님이 티비에 나와서, 강호동 님과의 썰을 풀어준 게 아직 기억에 남는다.

"혜련아,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지?"

"그렇지, 성공과 실패가 있지"

"틀렸다"

"뭐가 틀려?"

"인생에는 성공과 과정만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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