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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석 May 19. 2022

한강의 “흰”을 읽고

 



대학교를 다니는 딸은 전국에 친구들이 있다. 본래 소심하고 친구를 적극적으로 사귀는 애는 아닌데 온라인으로 사귀는 친구들은 전국 곳곳에 있는 듯하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책 이야기를 나누는지 가끔 친구들과 함께 읽은 책에 대하여 말한 곤 한다. 이번엔 한강의 소설 ”흰 “을 읽고 대화를 한 모양이다. 아빠는 읽어봤냐고 물어보며 이야기를 건다. 나는 읽지 않았기에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딸이 준 책을 펼쳐본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 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글의 첫 시작 부분이다. 온통 흰 것들이 나열되어 있다. 깊은 걸음으로 읽어야 할 책들은 늘 그렇듯 읽다 멈추어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작가가 기억을 떠올리며 쓴 책이었다. 태어나자마자 흰 강보에 싸여 차가운 흙 속에 묻힌 언니, 그리고 같은 운명의 또 한 명의 핏줄인 나(작가). 작가는 겨울이 길어 흰 눈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70여 년 전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흰 잿더미만 남았던 북유럽 어느 도시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일부가 되어 있는 사람(언니)의 이야기를 쓴다. 도망치듯 떠나온 지구 저편 도시가 오히려 깊은 곳 기억을 소환하였나 보다. 북유럽 한 낯선 도시는 왜 작가에게 오래된 기억을 떠오르게 하였던 걸까?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흰색 심포니 3번’



책을 덮고 줄거리 위에 놓여있는 중요문장을 되뇌어 보았다. 떠오르는 이미지에 생각을 맡기고 있었다. 어느 정신분석가가 말하는 자유 연상 기법이 작용한 듯, 연관된 영상이 나도 모르게 떠오른다. 소설 속 흰색의 이미지가 강렬하여 그랬는지 화가 휘슬러가 머릿속을 맴돌아 그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순백의 화가 휘슬러! 19세기 미국 출신의 화가인 휘슬러는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휘슬러는 당대에 배경으로만 사용하던 흰색을 그림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당시에 흰색을 얻기 위해서는 식초에 납을 잘라 넣고 납이 증기로 바뀌며 반응해 가라앉는 가루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은 납중독이 아니었나 추측을 한다. 휘슬러는 흰색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남겼지만 흰색을 만들며 생명을 단축하였다. 이런 휘슬러가 책의 줄거리를 다시 되짚어보는 순간에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설득력 있는 논리를 찾기 위해 다시 책을 깊게 읽어보며 연결의 맥락을 찾아본다.      


작가는 2차 대전 끝 무렵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북유럽 어느 도시에 머물고 있다. 그녀는 철저히 파괴되어 흰 잿더미만 남은 도시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 영상이 시작되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 눈에 덮인 것도, 얼음 위에 그을음이 내려앉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부서져 있었다. 돌로 된 잔해들의 흰빛 위로, 검게 불에 탄 흔적이 눈 닿는 데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도시의 흰빛의 잔해는 하얀 강보에 싸여 차가운 흙 속으로 사라진 언니를 소환시켰다.   

   

도시가 언니를 불러온 것은 흰빛으로 사라진 것이 닮아서만은 아니다. 당시 도시는 처참히 도 파괴되어 현존하는 병원, 학교, 미술관, 공원의 숲들은 모두가 70년 이상 된 것이 없었다. 오래된 듯한 궁전이나 호수 옆 왕들의 별장들도 모두 복원한 것이다. 간혹 남아있는 기둥이나 벽들을 이용해 복원된 것들은 파괴와 새로움이 경계 없이 서 있었다. 언니는 이 도시처럼 흰 잿가루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모든 색을 담고 있는 흰색의 영혼은 작가의 몸에서 복원되었다. 걸음걸이에서 말투에서도. 도시와 작가는 복원된 몸이 닮았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재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은 아랫부분이 살아 남아 그 위에 덧 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그 사람,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윤곽과 표정이 서서히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그 사람은 언니였다.      


한 사내아이를 더 잃은 엄마는 스물세 살에 그녀를 나았고 다시 남동생을 낳아 길렀다. 만일 언니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지금 그녀와 남동생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 본다.”      


사라진 자와 존재하는 자는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가까스로 마주 보고 있지만 “자작나무 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고,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은 그녀의 몸이 되어 걸음걸이, 숨소리, 글체에 남아있다.      


책을 읽으며 순백의 화가 휘슬러의 이미지가 떠오른 것은 화가가 사라지며 흰색의 예술은 살아났고. 죽음의 흰 잿더미에서 흰색의 예술은 펼쳐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흰색의 작품 속에 흰색의 수증기에 사라져 간 그의 생명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도시를 덮어쓴 흰빛의 잔해가 도시의 현재에 잠겨 있듯이, 강보에 싸여 차가운 흙속에 사라진 언니의 숨결은 작가의 하나하나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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