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기계 2

총 4회로 나뉘는 에세이입니다

by 새림

2.


말하면 잔소리. 우리 집 걱정기계는 물론 나다. 누군가 버저를 누르며 오늘의 걱정은 무엇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완벽하게 준비된 걱정거리 하나 정도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실력을 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놀리기 좋아하는 남편은 종종 요새는 어쩐 일로 전쟁 걱정을 안 하시나? 김정은이가 너무 오래 쉬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아마 나와 살면서 가장 어이없었을 때가 내가 전쟁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였던 모양이다. 그런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한편 웃기기도 해서 하는 소리겠지만 남편이 그 말을 꺼낼 때 나는 뭐랄까 나의 감추고 싶은 흑역사 내지는 비밀을 폭로하는 것만 같아 약간의 모욕감을 느낀다.


남편과 처음 만났던 이십 대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달랐다. 내 인생에서 아주 잠깐, 그러니까 대학엘 가고 사회에 나오고 했던, 한 십 년쯤 '센 언니'처럼 보이려고 용을 썼던 때가 있었다. 그래 봤자 결국엔 야금야금 다 들통이 났고 괜히 꼴만 더 우스워지는 것 같아 그만두려는 찰나, 남편을 만났다.


내 연기력이 그럴싸했다면 남편은 아마 내가 꽤나 쿨한 여자인 줄 알고 결혼을 했을 거 같다. 아니면 다 눈치채 놓고도 속아 주는 척 한 건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하다 하다 전쟁 걱정까지 하는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남편이라도 말이다. 하긴 너무 오래 같이 산 사람에게 무슨 수로 흑역사를 숨기겠는가. 알고 보면 내가 그의 살아 있는 흑역사일 수도 있는 것을.


강아지만큼은 아니어도 뒤늦은 이불킥에 관한 한 나도 누구에게 빠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했을까.'

'나는 그냥 한 소리인데 그 사람은 기분이 나빴겠다.'

'이제부터는 차라리 입을 꾹 닫자.'

'아까 나의 그 행동은 뭐지? 남들 눈에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노라면 새벽이 오기도 한다. 너무 한밤이라 강아지처럼 전화는 걸 수 없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어떤 땐 십 년 전, 이십 년 전에 있었던, 내가 내뱉고 저지른 말이나 행동들이 뜬금없이 둥 떠오르기도 한다. 그건 주로 설거지를 하거나 거리를 혼자 걸을 때다.

"미친..."


그럴 때 나는 몇십 년 전의 생각도, 철도 없던 내가 바로 옆에 있기라도 하는 양 생생하고도 찰진 욕을 퍼부어 준다.


약간 다른 문제긴 하지만 최근에도 부질없는 반성으로 잠을 설쳤다. 남편과 친하게 지내는 학교 동료 부부 몇을 집으로 부르고 나서였다. 벌써 십 수년 지기니 가깝다면 가깝고 어렵다면 어려운 분들이었다.


맛있다, 덕분에 잘 먹었다, 솜씨가 좋아졌다... 누구에게라도 했을 당연하고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들을 때까지도 나는 내가 진짜 오랜만의 손님 접대를 아주 잘했다는 생각에 심지어 기분이 좋았었다.

문제는 손님이 돌아간 그날 밤부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게 너무 많은 초대였던 것 같았다. 며칠이나 신경 써서 고르고 고른 메뉴도 뒤돌아보니 좋은 조합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손님 상에서 먹어 본 고기는 퍽퍽했고 전복 내장을 볶아 만든 소스는 짰다. 도대체 뭘 잘 차렸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자다 말고 그만 벌떡 일어나 앉았다.

게다가 더 최악은 마지막에 나 혼자 마셔 치운 맥주였다. 하루 종일 끼니도 걸러 가며 준비한 덕에 손님들이 식사를 다 마쳤을 때 나는 오직 맥주, 맥주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래서 마지막엔 결국 맥주 두 병을 혼자서 벌컥벌컥 마시고 말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천천히 와인을 마시던 손님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딱 한 잔만 마실 것을... 어쩐지 나를 보는 남편 표정이 약간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마 속으로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드디어 밖에서도 새는구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밖과 안이 바뀐 건가?


그날 이후 열흘쯤 잠을 설쳤다. 자다 깨면 즉시 그날 저녁 생각이 났다.


그럴 수도 있지. 음식이 짤 수도 있고 고기라는 게 퍽퍽할 수도 있지.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맥주 두병쯤 마실 수도 있지. 여자라서 잘못됐다는 거야? 집주인이라서 잘못됐다는 거야? 이 무슨 나답지 않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냐고.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가 않았다. 나중에는 이 일이 그렇게도 길게 이불킥을 할 일인가 싶어서, 그런 내가 싫어서, 또 이불킥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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