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결님이 여름방학에 대해 쓰자고 하셔서 잠깐 고민했지요. 제 옆엔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달랑 4번 가고 여름방학을 맞은 '닐니리 맘보'로 초딩 1학년 딸이 있고요. 방학이라지만, 밖에서 뛰어 놀 수가 있나, 마음 놓고 어디 견학을 갈 수가 있나... 집에만 콕 박혀있는 아이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듭니다. 게다가 100년 만의 폭우 덕에 집에 꼼짝없이 갇혀있지요. 제가 출근을 하니 짐작만 할 뿐이지만, 8시기상 -> 아침먹고 빈둥거리기 -> 11시 ebs 시청-> 그림 그리며 빈둥거리기 -> 점심 먹고 빈둥거리기 x10번 반복 -> 엄마 퇴근 후에 숙제 검사 & 리틀팍스 보기로 하루가 마무리되는 듯합니다. 여름 방학이라기엔 너무 재미없는 일과지요.
은결님이 아들 둘과 자주 캠핑 가는 모습이 참 좋아 보입니다. 밖에서 자는 거 질색이지만, 우리도 캠핑한번 가볼까? 했더니, 이미 근교의 캠핑장은 만원이라네요. 캠핑 용품도 불티나게 팔린다고요. 코로나 덕분에 멀리는 못 가고, 근교로 캠핑 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모양이에요.
어렸을 때 방학 때면 항상 할머니 댁에 가곤 했어요. 아빠는 일 때문에 같이 내려가지 못했고요. 엄마가 어린 두 딸을 양손에 잡고 어깨엔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무궁화호를 타고 시골로 내려가곤 했지요. 제가 며느리가 되어보니 엄마가 얼마나 억척스럽게 다녔을지 가늠이 됩니다. 인파로 복작거리는 서울역에서 행여나 두 아이 손 놓칠까 신경이 곤두섰을 테고, 가방 잃어버리지 않으려 얼마나 조심했을까요. 빼놓지도 않고 매 방학마다 시댁에 내려가는 엄마는 대체 무슨 정신이었을지. 저라면 그리 못했을 것 같아요.
전북 정읍시라고 들어보셨으려나요, 정읍시에서 또 한참을 들어가면 태인면이라고 있는데 저희 할머니 댁이 그 시골에 있답니다. 지금은 그래도 아스팔트 도로도 깔리고 정비가 좀 되었지만, 어렸을 땐 말 그대로 깡촌이었어요. 비가 오면 도로가 순식간에 진흙탕으로 변하던 곳. 집집마다 돼지며 소를 키우는 곳이 많아서 가축 분뇨 냄새가 공기처럼 깔린 곳이었죠.
깡촌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의 할머니네는 살림도 단출했어요.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작은 텔레비전 하나. 방 한 구석의 오래된 요강 하나. 몇십 년을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길 없는 오래된 장롱. 역시나 오래되어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벽에는 두서없이 사진들이 붙어 있었고요. 돌아가신 증조할머니 사진, 짓궂은 얼굴로 웃고 있는 아빠의 어렸을 적 사진, 아빠와 엄마의 결혼식 사진, 그리고 저와 동생의 아기적 사진 등. 할머니 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들을 박제해둔 것 같은 그 사진들을 전 몇 번이나 천천히 훑어보고 훑어보고 했던 것 같아요.
시골에 가는 가장 큰 기쁨이라면, 깨끗한 물이 언제까지나 흐르는 작은 내천. 먹을 것으로 가득한 밭과 과일나무. 작은 시냇가가 할머니네 집 근처에 있어서, 하루 종일 물놀이하던 기억이 나요. 올챙이인지 꼬물거리던 것들도 컵으로 잡고, 예쁜 돌멩이 수집한다며 물속에 코를 박고도 즐거웠던 때 가요. 덕분에 시골집에 한 번씩 다녀오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새까맣게 탔던 기억도 나고요.
할머니네 근처엔 제대로 된 마트도 없었고 구멍가게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나 있었어요. 덕분에 뭘 사 먹을 엄두도 못 냈지만 뒷산 밭에서 나던 작물들로 항상 먹을 게 많았어요.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기다린 옥수수나무는 얼마나 멋있었게요. 옥수수를 대야 한 가득 따서 담아오면 할머니가 솥에 슈가도 챙겨 넣고 푹푹 쪄주시던 기억.
쟁반 가득 찐 옥수수랑 복숭아를 쌓아 두고 할머니 몰래 바둑이한테 옥수수 몇 알을 까서 던져주기도 했고요. 깊은 밤, 잠이 안 온다 했더니 엄마가 어디선가 봉숭아 잎을 따와서 절구로 잎을 찧고 백반을 섞어 손톱에 봉숭아 물들여주던 기억도 나네요. 손톱에 막 물이 들었을 땐 색감이 그리 곱지 않은데, 흰 손톱이 조금씩 돋아날수록 손톱 위에 남은 쨍한 빨강이 돋보이던 기억도요. 참, 흰 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 물이 남아 있어도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ㅎㅎ
할머니는 솔직히 음식 솜씨가 좋진 않았어요. 매번 생선 조림을 해주셨는데, 비린내가 너무 심해서 먹기 힘들 정도였거든요. ( 전 참고로 생선 킬러입니다) 겉으론 또 어찌나 무뚝뚝한지 생전 우리 강아지들, 보고 싶었다 ㅡ 이런 말씀 한 번도 안 하셨던 듯요. 그래도 장손이라고 절 애틋하게 생각하셨다고..(정작 장본인은 잘 못 느낌)
그 할머니께서 췌장암에 걸리셔서 벌써 몇 해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리고 투병생활하실 때 저희 집에서 몇 달간 요양하셨어요. 새벽같이 일어나 밭으로 출근하던 일상 노동자가 가만히 집에 계시려니 얼마나 무기력해 보이던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저희도 시골 갈 일이 없어졌고요. 냇가에서 종일 놀거나, 강아지풀로 바둑이 코를 간질이며 소일하거나, 옥수수 밭에서 한량처럼 돌아다니던 그 기억을 제 아이에겐 말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아쉽습니다. 아이의 두 할머니는 모두 도시에 사니까요.
아직은 어리니까 이런 여유를 부리지만, 조만간 학원 뺑뺑이를 도는 나이가 될까요? 아이의 여름방학은 학기의 보충 학습 기간이 될 것 같은 아쉬움이 듭니다. 저에게 여름 방학은 뜨거운 여름, 살갗이 벗겨지도록 새까맣게 태워 노는 것이었는데. 그 시간들이 아득하기도, 아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