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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 소방관 심바 씨 Sep 18. 2020

공놀이 장애를 아시나요?

웃자고 써본 글인데 정작 본인은 심각한 이야기


내가 소방관이 되었을 때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완전 좋겠다 맨날 족구도 하고."

그럴 때 난 한숨을 푹 쉬며

"야 대한민국 소방관들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 입사해서 공이란 걸 본 적이 없어 한 번도. 아마 우리 소방서엔 축구공 자체가 없을걸."


그랬는데 지금 난 땡볕에서 3시간째 족구만 하고 있다.

3판 2선 승제를 3번 해서 이겨야 끝이 난다. 그냥 처음부터 9판을 할 거라고 했다면 마음이라도 사막 같진 않았을 텐데 지금 내 마음은 사막이요 퇴근이라는 희망을 찾아 어린 왕자는 그 사막을 헤매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공놀이 중증장애를 앓아왔다. 동그란 물체가 내 몸에 맞고 튕겨나가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축구 수비를 할 때 있는 힘껏 자살골을 넣은 적도 있다. 골대 그물이 거칠게 찰랑거리며 한동안 진정을 잃었고 같은 편 친구들은 아예 진정을 잃었다. 중학교 때는 합기도를 하고 고등학교 때 전공은 택견이었다. 용인대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괜찮은 운동신경과 실력이 있었다. 고3 때 체육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무 안타깝다고 말씀을 하셨다. 자기가 서울대학교 체육계열 특별전형에 나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체육 실기과목 중에 탁구 점수가 'C'여서 뭘 해줄 수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렇다 나는 심지어 도구로도 공을 잘 못 맞춘다.


나와 같이 공놀이 장애를 겪는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철봉 주변을 배회하며 철봉 피플이 되어갔다. 하나둘씩 모이더니 어느덧 우린 제법 조직이 되었다. 앉을 곳이 필요했던 우리는 평행봉에서 깔짝대던 멸치 같은 애들을 조직으로 흡수하며 지역을 넓혀갔다. 처음엔 평행봉 위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공 하나를 쫓아다니는 무리를 보며 고생이 많다 혀를 찼지만, 시간이 지나 학교 건물 4층 체육관을 장악하게 된 우리는 창문 밖으로 개미처럼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조망하며 일그러진 공교육의 현실을 논했다. 우리 중 몇몇은 저렇게 공 따라다니다가 수능도 치르지 않고 대학에 입학하는 어이없는 교육정책을 거세게 비판했다. 게다가 저들의 허벅지는 고등학교 시절 헤어스타일 다음으로 신성시 여겼던 바지핏을 더럽혔다. 어디 그뿐일까 우리 학교를 지나가는 버스에 항상 먼저 뒷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노랗게 흰 반팔티를 입은 옆동네 남고 축구피플은 존재 자체가 화생방 테러였다. 얘네는 몸에서 발냄새가 나기로 대전에선 유명했다. 그렇게 공놀이는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로 여기며 학창 시절이 지나갔다.


축구공과의 재회는 군대에서 이루어졌다. 특전부사관으로 자원입대하여 6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당당하게 검은 베레모를 머리 위에 얹었다. 6개월간 교관들이 얼마나 굴렸간 밥을 먹다가도 군대 상관이 이야기하면 난 이미 그 앞에 도착해있었다. 빠릿함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특전용사 심바의 첫 임무는 골대 뒤에 있다가 공을 주워오는 것이었다. 골대를 넘어 공이 날아가면 예상 낙하지점을 향해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가 공을 집어 돌아왔다. 갑자기 어릴 적 옆집 개 누렁이가 생각난다. 뭐든 던지면 하도 잘 물어오길래 두 개를 동시에 양방향으로 던져서 고민하게 했는데. . 미안.

아무튼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까웠을까 한 고참이 "야야!! 오지 마 발로 차 그냥"  그 말에 뻥 차올렸고 그 공은 다시 나에게로 떨어져 두 손으로 척 받았다. 다시 한번 공을 뻥 차올려 부쳤지만 예상 낙하지점은 전방 3m, 내가 달려가서 또 공을 척하니 받아냈다.

"아. . 저 X끼 지금 뭐하냐." 나는 멀리서도 고참의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난장이도 지가 쏘아 올린 공 이렇게 받지 않았을까.. 그 후로도 축구, 족구, 배구 등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서커스를 해야 했다.


 준비는 끝났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특전사 4년간 혹독한 서커스로 단련된 나는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으로 제대를 하였다. 1년간 아프리카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학교 추계 체육대회. 대부분 대학 동기들은 졸업을 하였고 그나마 졸업이 늦은 동기는 3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도서관 책상에 박혀 앉아 믹스커피로 연명하며 가을과 겨울도 구분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학과는 문과대학에서 10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우승을 내어준 적이 없는 강력한 운동팀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이번 시즌 우승으로 학과를 이끌어갈 체육부장으로 추대되었다. 나름 자신도 있었다. 내가 군생활을 지냈던 대대 역시 우리 부대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내어준 적이 없는 준체육대대였다. 마치 데자뷔를 겪는 듯 나의 체육대회는 시작되었다.


흰색의 광활한 보드판을 나의 글씨와 열정으로 도배를 해가며 열심히 대학 후배들에게 나의 작전을 설명했다. 눈에 쌍심지를 켠 후배들이 끄덕거리자 미국에서 교환 교수로 온 마이클까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의 필승 전략에 동조를 하였다. 계주는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바통을 이어받는 타이밍과 거리감이 중요하다. 바통을 전달할 땐 던지면 안 된다고!... 말을 안 해줬다. 탈락.

줄다리기는 모든 체육대회의 꽃이다. 이 역시 군대에서 여러 번 우승을 통해 승리의 DNA를 가지고 있었다. 줄다리기는 줄을 겨드랑이에 끼고 직후방으로 몸을 누우면서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으샤" 구령과 함께 하체로 당기면 된다. 삐~빅 불면 , ‘빅'에 당기는 거다. 첫음에 당기고 싶은 맘 알겠는데 삐~ '빅'에 당기는 거라고!!. 빅! 호루라기 삐빅비빅은 뭔데 또?! 왜 네박자야. 송대관이야? 탈락.

예비역들의 올림픽, 족구가 시작되었다. 난 군대에서 축구선수 출신이 때리는 공도 머리로 죄다 받아냈다. 저 정도의 아기볼 따위는 어? . . 어라? 잉?

분명 슬로우 모션으로 오는데 난 왜 못 받지?! 탈락.

패인은 그러했다. 군대에서 족구를 시킬 때 센볼은 머리로 받는 게 안정적이다 보니 최대한 발을 아끼고 머리로 받도록 연습을 시켰다. 결국 난 헤딩이 눈 부시게 늘었고 발은 여전히 장애를 가진채 전역을 한 것이었다. 헤딩으로 받을만큼 세게 때리지 않으면 난 발을 쓸 수 밖에 없으니 당연히 공이 응원단한테 가지.

체육대회 3등. 애초에 문과대학에 3~4개 학과만 열심히 참여하는 거 감안하면 꼴찌 실세인 셈이었다. 난 그 길로 공놀이계를 은퇴하며 다신 동그란 물체가 내 몸에 닿는 일이 없도록 청결을 지켰다.


현재로 돌아와서 난 요즘도 열심히 공을 쏘아 올리는 중이다. 물론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공놀이 장애를 겪는 중이다. 나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지만 공이 나를 향해 날아오면 마음이 전쟁터 같다. 그런 나를 위해 우리 노딩크 주임님께서 조언을 아끼시지 않는다.

"어. . 최반장 발에 힘을 좀 빼. 이게 인생이랑 비슷해. 힘을 좀 빼야 공이 잘 올라가."

" 최반장 앞으로, 앞으로 밀어야지!"

" 최반장! 리시브는 받아야지!"

" 최반장!! 아. . ."


 사실 주임님 제가요 잘하고 싶은데 사정이  복잡해요. 절대 반항하려고  그렇게   아니고요. 해주신 말씀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엔  그냥 교회 가면 안될까요? 하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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