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옫아 May 31. 2022

세상을 멈추고 시간을 느리게 가게 만드는 사람에게,

세상을 멈추게 해주는 사람과의 연애에 대한 단상

다음 주엔 특별한 이벤트가 하나 있다. 바로 나와 내 남자친구의 4주년. 그러니까 어느덧 우리는 16번째의 계절을 함께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어떤 사람과도 이토록 긴 연애 기간을 가져온 적이 없었고, 이에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신기록에 대해 놀라워한다. 물론 이 상황이 가장 신기한 건 바로 나 자신. 그만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컸고, 맹세컨대 변함없이 그 마음을 지켜왔다. 남자친구의 장점과 매력에 대해 논하자면, 지금 당장 논문 집필(혹은 대서사시)을 시작해야 하겠지만,  오늘은 내가 남자친구에게 가장 끌렸던 한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 기준 설렘 포인트인 동시에 나에 대하여, 정확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했던 경험이다. 흔히들 연애를 하면서 스스로를 알아간다고 하지 않나. 딱 그 사례에 부합하는 이야기다.


그 날은 남자친구를 두 번째로 만나는 날이었다. 아침 7시부터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내려온 남자친구. (우리는 지금도 장거리 커플로, 남자친구는 경기도에, 나는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거의 9시부터 만나서 촘촘한 데이트를 이어가고 있었다. 호수공원도 걸어야 하지, 점심도 먹어야 하지, 서점 데이트도 즐기고 도서관도 한 번 가봐야 하지, 이른바 '빡센 데이트'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그토록 고된 일정에 조금은 지쳤었는지, 중간에 카페에서 잠시 쉬어갈 때 편하게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그 모습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편하신가 봐요?"라고 얘기했다고. 사실 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기억이 아니었으나, 남자친구의 머릿 속에는 생생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그순간 남자친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 한성깔하겠다,라고.  


앞서 이야기한 호수공원, 점심, 서점 데이트, 도서관 탐방, 카페 투어에 영화 <독전> 감상을 끝으로 데이트를 마치려고 했다. 이정도면 완벽했겠지. 정말 빈틈 없이 알찬 데이트야, 라고 내적 만족감에 취해있던 그때. 아니, 글쎄 남자친구가 타고 올라가야 할 버스 시간까지 약 1시간 정도 시간이 붕 뜬 것이다. 내 시간 계산과는 조금 어긋나버린 상황에서 잠시 우왕좌왕했다. 여기서 버스터미널까지 차로 약 30분, 그러면 남은 30분은 어디에 써야 하지? 등 다양한 상황 시뮬레이션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소중한 시간인데 이왕이면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조금은 초조했던 것 같다. 주차되어 있는 내 차에 탄 후 무엇을 해야할지 허둥지둥거리며, 남자친구에게 혹시 하고 싶은 거 있냐며 재촉하듯 묻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성깔하는 모습 버전2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려나.) 정신없이 다양한 선택지들을 설명하고 있는 내 손 위로 남자친구의 손이 올라왔다.


나는 괜찮아. 그냥 여기서 가만히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그 순간, 내 시계가 딱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정지되어,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 그야말로 반했다는 표현이 맞을까? 아니, 나는 그에게 반했다기보다, 이제 내가 어디에 안착해야 하는지 그 목적지를 찾은 느낌이었다. 아, 이건 내가 평생 찾아 헤매었을지도 모른, 그런 안정감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의 말에 내 몸에 골고루 퍼져 있던 긴장들이 한 번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내게 한 번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다.


2018년 당시 회사에서 부장님이 내게 지어준 별명은 '경주마'였다. 목표가 생기면 그 하나만을 향해 돌진하는 열정사원으로,(지금도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시에는 입사 3년차로서 열정과 성실이 남달랐던 것 같기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내 건강을 비롯한 컨디션에 대해 불안하다는 걱정을 주었다. 앞서 인정 욕구에 대한 글(인정 욕구가 나에게 선물한 3가지 (brunch.co.kr))을 썼다시피, 사회적인 기준과 나에 대한 기대감을 모두 충족시키고자 한 몸 다해 열정을 불태우곤 했다. 실제로 그때는 '그 흔한 휴학 없이 한 번에 졸업, 3전공을 했지만 4년 안에 졸업, 졸업 전에 정규직 취업, 사원 신분으로 받은 대외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이어가며 추진 중이었고, 인생은 이렇게 알차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의 빨간 구두를 신고 신나게 날뛰던 시기였다. 그때 내 남자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남자친구의 말은 내게 엄청나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시간을 쪼개가면서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수 있다니. 그 괜찮음이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각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니. 뭔가를 하지 않으면 한창 불안해하던 나에게 더없이 필요한 말이었다. 이런 걸 어쩌면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나.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남자친구를 마주보았다. 순수하면서도 편안하고 정돈되어 있는 얼굴.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찾아 헤맨 안정감을 너를 통해 만날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감이 들었고, 이 사람과 함께하게 그것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고,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그 다음 번 만남부터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친구와 나의 소개팅을 주선해준 사람은 나의 회사 후배이자 남자친구의 중고등학교 친구다.(남자친구는 연상이고, 소개팅 주선자는 내 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입사는 내가 먼저 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내 남자친구와 나는 마치 '스님과 개'같다고(다른, 닮은 사람과의 연애를 지속하며 (brunch.co.kr)). 그만큼 활발하고 정신없는 내 성향과 언제나 평안함을 유지하는 남자친구의 성향은 꽤 상반된다. 강아지와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성향이 분명한 스님과 개. 하지만 강아지와 고양이의 관계와 스님과 개의 관계가 갖는 차별성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스님과 개가 서로에게 미칠 영향이지 않을까. 그게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같고. 스님은 개를 품고, 개는 스님을 웃음 짓게 하고.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존재이지만, 함께할 수 있고 그 조합은 꽤 괜찮다는 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하면 무채색 세상이 컬러풀해지고, 멈추었던 게 움직이며 생동감을 찾을 것만 같았는데, 내 경우는 그 반대였다. 정신 없이 돌아가던 나의 세상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게 되었다. 천천히, 무겁지 않고 산뜻하게. 그렇게 내게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성공이나 인정만이 아닌 나다울 수 있고 목적을 위해 나를 해치치 않은 수단마저 건강할 수 있는 일상을 지켜가는 게 되었다. 매해, 연말이 다가오면 나는 남자친구에게 항상 묻는다. 내년에 하고 싶은 게 무엇이고, 바라는 건 어떤 건지. 그러면 돌아오는 답은 거의 같다. 나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건강. 30대 초반이 20대 후반 여자친구에게 바라는 것치곤 상당히 올드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그 답변을 들었을 때는 꽤 황당했지만, 어느덧 그 사람의 말이 누구보다도 진심 어린 소원이라는 걸 알기에, 그 마음이 감사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나날이 더 건강해지는 날 마주하게 된다. 결코 건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며 스스로를 망가지게 했던 시간들이 있어왔다. 나를 나만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게 말한다, 스스로를 조금 더 보살폈으면 좋겠다고. 이에 나는 진정으로 응답하고자 적절한 휴식을 게으름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아프면 아프다고 회사에 말하고 당당히 쉬고, 또 좋은 컨디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건 그와의 두 번째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들이었다.


남자친구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내게 말해주는 변화가 있다. 바로 굉장히 안정적이고 calm해진 내가 되었다는 거. 천방지축 같았던 내가 조금은 차분해진 모습을 갖게 되었고, 안정을 찾아가며 꽤 평화로워졌다고들 말해준다. 그리고 덧붙이는 이야기는, 남자친구 잘 만난 것 같다고. 남자친구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기 위해서 움직인 바들이 결국은 단단하고 평화로워진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나와 너무 다른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사랑의 언어로 말했던 '배려'를 배워가고 실천하는 동안 나의 오랜 친구들은 감격하기까지 했다.. 연애란 정말 이런 걸까. 내가 갖지 않은 모습을 갖게 되고, 내가 몰랐던 언어들을 배워가는 것.


만난 지 4년이 되는 지금 이 시기. 여전히 종종 싸우지만 또 여전히 현명하고 슬기롭게 풀어가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 글들을 통해 너무 다른 만큼 힘들었다고 고백한 적 있으나, 너무 달랐기에 배워가고 스며들 수 있었던 부분들이 존재함을 오늘에서야 말해본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내 모습만큼, 분명 남자친구의 현재 모습에도 나의 중요한 지분이 있으리라 자부한다. 한때는 남자친구에게 물들어 가는 내 모습이 나를 잃어가는 것일까봐 지레 겁먹었던 적도 있었다. 평안하기보다 정신 없이 바쁘고 그에 따라 인정 받는 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나라고 믿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만큼, 내 마음 한 켠에서도 원했던 거다, 내가 힘들지 않고 중심을 찾아가며 나아가길. 그런 내 내면의 목소리와 남자친구의 바람이 만나,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히 숨 쉬고 또 건강한 나날들을 만나려는 나를 만나게 된 거겠지.


때론 세상을 멈추게 해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 사랑을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기꺼이 일구고 만나고 있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해가 안 되면 암기를 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