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인용
애정의 한 형태는 그 존재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할 게 많아지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 건영이가 그렇다. 이미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쓴 적도 있으나(푸르른 하늘, 건영이에게 (brunch.co.kr)) 건영이를 생각하면 이것저것 이야기할 게 많아진다. 그래도 그 이야기들을 모으고 모아 하나의 키워드로 묶어본다면 나는 그것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다정함'이라고 일컫고 싶다. 내가 건영이에게 쓰는 편지에 종종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네가 있어서 태어난 게 덜 외로워
황인숙 시인님의 '일요일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을 일부 인용한 건데, 건영이를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그 시를 연상하게 된다. 건영이의 다정함 덕분에 나는 많은 부분을 그녀로부터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건영이의 넉넉한 마음 덕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건영이는 나의 허밍과 같은 다소 불확실한 음정들에 대해 정확한 음으로 바꾸어 알려주는, 올바른 건반을 찾아주고 눌러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건영이는 마냥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똑똑하고 섬세한 다정함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사실 내가 겪은 부정적인 사건을 지인에게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사건을 다시 말함으로써 당시의 감정이나 상황을 상기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상황이 반복재생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때의 좋지 않은 감정을 한 번 더 겪기 되기 때문이랄까. 하지만 때때로 말함으로써 풀리는 스트레스도 있지 않는가? 물론 악용하는 경우 일명 감정 쓰레기통이 되겠지만. 나에게는 건영이는 나의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고백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예전에 건영이가 내가 힘들거나 심각한 고민을 본인에게 많이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글쎄, 나는 그 많은 자잘한 사건들을 오직 건영이에게만 말하는데 말이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이벤트 준비할 때 가까운 친구랑 조금 싸운 적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도 충분히 억울했고, 그 친구가 나에게 보여준 공격적이고 무심한 태도가 매우 상처였다. 혼자 끙끙 앓고 분노하다가 참다못해 건영이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건영이는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았던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주었다. 나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빡침의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공감해 주었다. 마치 아기들의 옹알이를 부모가 제대로 인지하는 것처럼 건영이는 나의 두루뭉실한 감정들에 하나씩 이유를 찾고 깊이 공감해주었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다 헤어려 줄 수 있는 걸까. 그때 받은 공감으로 인해 나는 평정심을 찾고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 다친 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나는 때때로 의문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은 확실하나, 그 근원을 찾지 못하고 이에 따라 무지한 상태에서 쉽사리 공격해 오는 내 감정들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감정에 놓여 있고,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 감정이 발화된 걸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특수한 경향이 있고 그것을 본인 입장에서는 더 극대화하여 느끼곤 하지만 특히 나는 감정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남들과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누구라도 기분 나쁠만한 상황에서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고,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구간에서 혼자 넘어져서 엉엉 울거나 분노하곤 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은 언제나 외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감정과 경험의 영역에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지나쳐온 순간들이 꽤 많았고 그 시간들은 여전히 상처로 내 어딘가에 남아있겠지. 마치 인기가요 TOP100의 음악을 하나도 모르는 기분, 천만 관객이 넘은 영화의 예고편을 보지 못한 기분. 그렇게 쉽게 속하여 공통된 감정을 나누거나 느끼지 못한 적이 분명 있어왔다.
그러나 건영이를 만나고 나는 덜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내 마음의 정확한 건반을 눌러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있기에, 나보다 더 격양된 감정 표출해 주며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있기에 내게 다가올 어떤 시련도 이제는 조금 덜 무섭다고나 할까.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건영이만큼 훌륭한 마음의 파노라마를 갖추지 못해서,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깊은 폭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원래 이래, 라는 변명 대신 건영이가 내게 해주는 양상들을 세밀하게 살펴서 언젠가 그녀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녀의 심정을 변호해 주기로 다짐해 본다. 어려운 다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은, 그 다짐을 하기까지 내가 받아온 감사함과 포근함에 기대어 기꺼이 용기내고 노력해보겠다. 정확한 건반을 눌러주는 건영이. 그녀 덕분에 내 삶의 일정 구간이 두루뭉실한 음정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을 하나씩 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너의 세밀한 다정함에 감사할게! 건영아. 내일 만나자.